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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 불끈 쥐고 ... 분노하라, 반항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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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호 17면

쿠페(coup ) 프랑스어로 ‘잘린’을 뜻하는 발 동작. 흔히 한쪽 발끝을 다른 쪽 다리의 무릎에 대는 동작을 말한다. 발끝으로 서서, 뛰면서 등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다.

‘요즘 현대무용계에 대세는 누구?’ 이런 질문을 받으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현대무용이 다양성의 미학을 중요시하다 보니 각기 다른 색채로 빛을 발하는 예술가가 즐비하기 때문이다. 결국 너무 많아 지목하기 힘들다는 말인데, 이면에는 시대를 대표할 만한, 사회와 진정으로 소통하는 예술가를 딱히 꼽기 어렵다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안무가 호페시 셱터의 대표작 2편을 보면서 대세의 조건은 무엇인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영국 호페시 셱터의 현대무용, 3월 22~23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2006년 작 ‘반란(Uprising·26분)’과 2007년 작 ‘당신들의 방에서(In your rooms·40분)’는 마치 하나의 작품을 1, 2부로 나눈 듯 같은 형식이다. 객석까지 차오른 스모그, 일렬로 매달린 수십 개의 조명등, 굉음에 가까운 강렬한 사운드, 티셔츠와 면바지를 입은 일상복 차림의 무용수, 그리고 격렬하게 숨을 몰아가다가 매우 단순하고 흥겨운 동작을 반복하는 식의 움직임. 이러한 표현방식은 ‘정치적 반항’이라는 주제에서 다시 한번 만난다. 빨간 깃발을 치켜든 군중을 묘사한 ‘반란’의 마지막 장면과 ‘당신들의 방에서’ 중 등장하는 ‘지도자를 따르지 마세요’라는 푯말이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하듯. 2010년 초연 당시 내한공연을 가진 바 있는 ‘폴리티컬 마더(Political Mother)’는 이 성공작 2편을 심화시킨 작품이라고 하겠다.

어느 인터뷰에서 셱터는 예술과 정치를 언급한 적이 있다. 정치인들은 예술을 게임에 불과한 듯 얕보지만 예술은 정치보다 훨씬 현실적인(사회를 변화시키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그 둘을 섞는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도 좋을 것이라고 소극적으로 결론을 내리지만, 이는 곧 그의 전투적인 예술철학을 대변했다.

영국을 터전으로 활동하는 이스라엘 태생의 셱터. 오하드 나하린, 버락 마샬, 이칙 갈릴리 등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스라엘 태생 안무가들의 움직임에는 광적 순발력 뒤에 민족의 애환을 담은 서정성이 있다. 한편 동작 속에 게릴라적 요소가 없는데, 변칙적 표현을 배제한다는 뜻이다. 연극, 영상 등 타 장르에 의존하지 않는다. 결국 춤추는 데 있어 일정한 규칙은 지키되, 도발적 열정만큼은 넘쳐난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색채는 지역적으로, 정서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가진 한국의 관객에겐 최고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정치적 성향이나 태생에서 묻어나는 열정 때문에 ‘셱터가 대세다’라고 인정하게 된 것은 아니다. 대중과 친근한 록 콘서트를 연상하게 하는 감각적 에너지 때문도 아니다. 셱터의 작품에서는 동시대 춤추는 이들에게 들불처럼 빠르게 퍼져나간 ‘자신감’이 보이기 때문이다.

7명의 남자가 연기 속을 헤치고 의미심장하게 걸어나오는 ‘반란’의 첫 장면. 죽음의 전장과 고난의 사회를 만든 지도자를 비난하듯 의미심장하다. 이어 발레의 쿠페 자세를 취하고 한동안 서 있는다. 이제부터 얼마나 자유롭게 춤 역사에 얽매인 관습을 떨쳐버릴지에 대한 출사표와 같다. 자신만만하다.

음악과 춤의 결합에서도 그렇다. 작곡을 직접 하는 셱터는 춤을 리드하거나 보조하기 위해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춤과 음악을 동급으로 다룬다. ‘당신들의 방에서’는 2층 상단에 라이브 연주자를 배치하고, 타악기 연주로 동작의 비트를 압도한다.

셱터가 좋아하는 동작이 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오른팔을 높이 들어 흔드는 것이다. 거기에는 분노가 있다. 분노는 곧 반항으로 이어지고, 반항은 곧 힘으로 표현된다. 20세기 최고의 반항이라 꼽을 만한 니진스키의 ‘봄의 제전’의 것과 흡사하다.

이미 셱터의 춤 경향을 모방해 안무하는 추종자가 많다. 추종자가 많다는 것은 곧 그가 대세라는 것이며, 또 하나의 새로운 트렌드가 생겨났음을 말한다.
그런데 예술가에게 있어 대세로 인정받는 순간,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충격의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2006, 2007년의 작품은 셱터의 히트작일 뿐, 트렌드가 되는 순간 신선도를 잃었다. 예술가에게는 사회비판보다도 더 중요한 막중대사(莫重大事)가 있다. 창조는 그들의 우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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