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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감 제로’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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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김현기
도쿄 총국장

지난 26일.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은 저마다 분주했다.

 오전 10시30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한국외국어대를 찾았다. 북한에 대한 강한 경고 메시지는 즉각 전 세계의 전파를 탔다. 이명박 대통령과 중국 후진타오 주석도 오전 10시 회담을 갖고 북한의 미사일 발사 움직임에 공동 대처할 것을 약속했다. 다음날 주요 신문들의 톱기사였다. 러시아의 메드베데프 대통령도 11시45분 오바마 미 대통령, 오후 2시에는 이 대통령을 만나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하기 전에 주민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확고한 메시지를 연발했다. 53개국 정상과 유엔 등 4대 국제기구 수장이 한데 모였던 이번 회의는 화려한 외교무대였다. 모두가 경쟁적으로 세계의 질서를 논했다. 그 안에서 6자회담 당사국의 존재감은 단연 최고였다. 하지만 딱 한 곳 예외가 있었다. 원래라면 회의의 주역이 됐어야 할,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당사국 일본이었다.

 같은 날 일본 도쿄의 나가타초.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9분까지 총 8시간9분을 국회에 잡혀 있었다. 참의원 예산위원회 때문이다. 매우 중요하고 생산적인 논의 때문이었다면 그러려니 하겠다. 하지만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한 일본 대사관 앞 위안부 평화비의 문구가) 정확한 사실과 크게 괴리돼 있다”는 망언도 여기서 나왔다. 동석한 겐바 고이치로(玄葉光一郞) 외상은 한 술 더 떴다. 미국 뉴저지주 팰리세이드파크 시의 위안부 추모비를 두곤 “그 동네 주민의 3분의 1이 한국계”라고 폄하했다. 아무리 머릿속이 우익과 보수로 꽉 차 있다 해도 반나절 후 서울을 찾을 시점의 발언치곤 외교적 센스 0점이었다.

 노다 총리는 26일 정상들과의 공식만찬에도 불참했다. 서울에 도착한 시간이 밤 9시. 27일 귀국도 예정보다 3시간이나 앞당겼다. 결국 서울 체재시간은 불과 18시간. ‘시간이 없어’ 일본은 한·미·중·러 등 어느 곳과도 회담을 하지 못했다. 이쯤 되면 외교적 능력 또한 0점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TV엔 물끄러미 회의장 자리에 외롭게 앉아 있는 노다 총리의 모습이 부각됐다. 밖을 못 보고 안에서 싸움만 하다 절로 ‘왕따’당하는 신세다.

 노다 총리는 “(다른 지도자와 달리) 난 매일 국회에 불려나가야 한다”고 탓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외교행사 참석은 야당에 양해를 구했으면 충분히 가능했다. 노다 총리는 아예 그걸 하지 않았다. 소비세 인상안 처리를 앞두고 야당의 눈치를 봤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뿐이 아니다. 노다 총리는 이미 이달 초 “이번 회의에 가더라도 한국과는 양자회담을 않겠다”는 ‘지침’을 이미 하달했다고 한다. 위안부 문제를 놓고 얼굴을 붉혔던 지난해 12월 ‘교토의 추억’ 때문이다. 주최국 정상과 안 만난다고 하니 다른 일정 또한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눈치를 보건, 눈총을 받건 일본의 자유다. 하지만 아예 무대에 오르지도 않는 일본이 너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