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고싶어 근질근질 … 그런데 욕심 버리니 희열 있더군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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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체가 돌아왔다’에서 이범수는 범죄는커녕 사소한 불법도 저질러 본 적이 없던 유전자 연구원 현철 역을 맡았다. 그는 의도치 않게 시체 납치극에 휘말리면서 뛰어난 전략가로 거듭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배우 이범수(42)는 억울하다. 성실하게 연구에 매달렸건만 부당해고를 당하고(영화 ‘시체가 돌아왔다’), 그저 평범한 샐러리맨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음모에 휘말려 살인 누명을 쓴다(드라마 ‘샐러리맨 초한지’).

 최근작뿐만이 아니다. 평생 역기만 들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의 설움이고 (‘킹콩을 들다’), 가족의 사랑을 깨달으려고 하니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이대로, 죽을 순 없다’).

 배우 이범수를 관통하는 정서는 소시민의 억울함이다. 그래서 그는 자주 ‘버럭’한다. 그는 이 억울함, 불의, 모순에 저항하고 싶은 우리들의 바람을 대변한다. 억울함의 아이콘에서 소시민의 영웅으로 거듭나 해피 엔딩하는 일련의 작품 속에서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 연장선에 있는 영화 ‘시체가 돌아왔다(29일 개봉)’로 돌아온 그를 26일 서울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시체가 돌아왔다’는 연구원 현철(이범수)과 뺑소니로 아버지를 잃은 동화(김옥빈), 사기꾼 기질이 다분한 백수 진오(류승범)가 거금을 걸고 시체를 훔치면서 벌어지는 범죄사기극이다.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똘끼’로 무장한 역할들 속에서 이범수는 홀로 정극 연기를 하며 작품의 중심을 잡는다.

 -밋밋한 캐릭터를 맡았다.

 “시나리오를 보니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욕먹는 역할이더라. 그런데 무난한 캐릭터를 갖고 배우가 어떻게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자극적인 캐릭터는 아니지만 영화의 힘을 유지하고 이끌어 갔다는데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본다.”

 -주변 캐릭터를 살려주고, 조율하는 것이 ‘무한도전’에서 유재석 역할 같다.

 “축구 포지션으로 따지면 미드필더다. 내가 골을 넣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시야를 넓게 보면서 슛 찬스가 나도록 볼 공급을 잘 해주는 역할이다. 해보니 희열이 있더라. 사실 나도 얼마나 몸이 근질근질했겠나(웃음). 원래 공격수 출신이고, 승범이나 옥빈이가 계속 자극을 하는데.”

 -시체만 훔치면 될 줄 알았는데 일이 점점 꼬여간다.

 “그 동안 한국 코미디물은 말장난으로 웃기고, 배우의 개인기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작품은 다르다. 신선한 발상과 복잡한 상황이 재미를 만든다. 또 편집이나 미장센도 공을 많이 들였다.”

 -‘샐러리맨 초한지’의 유방 역할도 그렇고 소시민의 보편적인 정서를 그리는 데 능하다.

 “꼭 그런 역할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에 관심이 많다. 학창시절 노점상 할머니에게 욕을 섞어가며 몇 만원을 더 얹어주는 불량배를 본 적이 있다. 그 남자는 불량한 삶을 살았을지언정 추운 날 밖에 나와 고생하는 할머니가 불쌍했던 거다. 이런 다채로운 인간의 얼굴을 그려내고 싶다.”

 -12년간의 힘든 조·단역 시절을 거친 것이 자양분이 된 건가.

 “그렇다. 예전엔 현재의 모습보다 과거에 저렇게 고생해서 주연이 됐다는 것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불편했다. 하지만 철이 들고 연륜이 쌓이면서 그때의 기록들이 자랑스럽다. 단계별로 인정받고 차근차근 성장했다는 뜻이니까.”

 이범수는 일이 없을 때, 옆집 아저씨처럼 길거리를 혼자 돌아다닌다고 한다. 카페에 들어가서 사색도 하고, 쇼핑도 다닌다. 배우 후배들이 “형, 어떻게 돌아다녀”라고 묻지만 그럴 때마다 이렇게 대답한다.

 “야 이 미친놈아! 왜 못 걸어 다녀. 자유롭고 싶어서 배우를 택했는데. 걷고 싶으면 걷고, 자고 싶으면 자고, 앉고 싶으면 앉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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