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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손끝에서! 모든 게 이뤄졌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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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호 23면

명품 브랜드의 장인들은 아무리 경력이 오래됐어도 직접 인터뷰하지 않는다. 작업으로만 말한다는 브랜드와 장인의 자부심이기도 하고, 한 가지에만 몰두하는 장인들이 원체 말이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페스티발 데 메티에’는 통역을 통해 궁금한 것들을 장인의 입으로 들을 수 있는 드문 기회다. 역시나 장인들의 입은 무거워 설명 많은 답이 돌아오진 않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이해하기엔 충분했다.

에르메스 장인 축제 ‘페스티발 데 메티에’ 가 보니

처음 6개월은 켈리백 손잡이만 만든다
행사장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이는 말 안장을 만들고 있는 장인 로망이다. 화제가 되고 관심이 쏠리는 건 핸드백이지만, 마구(馬具)는 에르메스의 뿌리다. 가방을 제작할 때 말 안장을 꿰매는 방식인 ‘새들 스티치(Saddle stitch)’가 사용되는 걸 봐도 에르메스 가죽 제작의 출발점이 이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망은 나무로 틀을 만들고 가죽을 띄워 바느질과 마름질을 하는 전 과정을 맡는다. 보통 하나를 제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5시간. “고객의 주문에 따라 최대 100시간도 걸린다”고 한다. 다른 제품과 달리 안장은 두 가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안장 위에 앉는 사람과 안장을 지는 말이다. 그 때문에 아틀리에를 방문한 고객의 체형을 측정하는 것만 아니라 말의 크기와 등의 굴곡을 확인하는 것도 장인의 역할이다. 로망은 “에르메스 메종의 상징을 만든다는 점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버킨백을 옆에 두고 작업하는 이는 강희선씨다. 2000명에 달하는 에르메스 가죽장인 중 유일한 한국인이다. 그는 잠금장치가 있는 버킨백 덮개의 스트랩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1시간 넘게 지켜보는 내내 작업은 스트랩에 머물러 있었다. 모서리를 다듬고, 풀을 칠해 금속 장식을 붙이고, 나사를 망치로 두드리는 모든 과정이 아주 천천히 차분하게 진행됐다. 끝내 다른 부분의 제작을 보지 못한 채 자리를 옮겼는데, 그는 “사람들이 이런 작업 과정을 보면 왜 비싼지 알겠다고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각 장인이 만드는 모델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궁극적으로 혼자서 여러 가지 가방을 만들 수 있도록 배우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배움의 시작은 켈리백이다. 입사 후 처음 1년간 켈리백을 만드는데, 이 중 6개월은 손잡이만 만든다. 크기·소재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버킨백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20시간. 재미있는 사실은 장인들이 직접 만든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다닌다는 점이다. 가죽 가격만 지불하면 된단다. 이날 볼리드백을 들고 왔다는 강씨는 “가방을 들었을 때의 느낌과 사용감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국에서 섬유미술을 전공하고 가죽 공부를 위해 파리에 왔다는 강씨는 인턴십 기간을 포함해 7년 넘게 에르메스에서 근무하고 있다.

시연품은 폐기한다 ... made in France가 아니니까
넥타이를 만드는 베아트리스의 작업대는 단출하다. 재료인 넥타이 심과 실크가 쌓여 있고, 연장이라곤 실과 바늘·가위뿐이다. 그는 재단된 실크로 심을 감싸고 손바느질을 한다. 넥타이 뒤판의 중심을 따라 촘촘하게 한 땀씩 꿰매는데, 하나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15분 정도. 그의 작업은 바느질까지다. 이후엔 또 다른 장인이 다림질로 매끈하게 펴는 등 후작업을 마친 다음에야 넥타이는 매장으로 공수된다.

셔츠를 제작하는 나디아도 손바느질에 한창이었다. 셔츠는 미싱과 수작업을 함께 사용해 만드는데, 소매의 둥글린 부분이나 목덜미의 끝부분처럼 마무리가 중요한 부분은 한 땀씩 손바느질을 한다. 그렇게 해서 한 벌을 만드는 데 3~4시간이 걸린다. 하루에 많아야 두 벌을 만든다. 색깔·무늬가 특별할 게 없는 셔츠가 에르메스라고 다를까 싶은데 나디아가 두 가지를 보여준다. 아주 작은 H 무늬가 들어간 옷감과, 구멍이 여섯 개 뚫린 단추. “여섯 구멍 단추를 달면 실로 에르메스의 ‘H’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옆엔 이미 완성된 셔츠가 너덧 벌 걸려 있는데, 이번 행사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것이다. 그런데 “행사가 끝나면 폐기할 예정”이란다. “프랑스 외부에서 만들어진 것은 ‘메이드 인 프랑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장인들과 달리 시계를 제작하는 타냐는 스위스에서 왔다. 최고 품질을 찾는 에르메스가 시계만은 스위스에서 만들기 때문이다. 에르메스는 이미 1930년대 중반부터 스위스 시계 제작자를 고용해 남녀용 시계를 만들었다. 다른 명품 브랜드보다 한발 앞서 30여 년 전 스위스에 공장을 짓기도 했다. 타냐도 스위스에서 시계학교를 나왔다. 외알 안경을 목에 걸고 몇 ㎜에 불과한 작은 부품을 핀셋으로 집어 조립하는 과정은 시계의 복잡도에 따라 최대 1주일이 걸린다.

이번 행사엔 테이블웨어 장인도 참가했다. 이를 위해 에르메스는 가마도 설치했다. 수십 개의 붓을 펼쳐놓고 접시 위에 그림을 그리는 크리스티나는 포슬린 장인이다. 그릇 위에 디자이너가 만든 패턴을 옮겨 그리고 정교하게 색깔을 입히는 작업에 한창이었다. 특수 물감을 사용하면 그릇 표면에 양감도 줄 수 있다고 한다. 맨 마지막은 테두리에 금색을 입히는 것인데, 여기까지만 6시간이 넘게 걸린다. 하루 종일 칠하고 저녁에 한 번 가마에 다시 굽는 것이다.

크리스털 장인인 나디아도 붓을 들고 있었다. 그는 에르메스가 소유한 생 루이(Saint Louis)에서 30년을 근무했다. 생 루이는 1767년 설립된 프랑스 최고의 크리스털 브랜드다. 그는 조각이 새겨진 크리스털에 금으로 장식을 한다. 금에 용매를 섞고 물감처럼 만들어 붓으로 ‘금칠’을 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금색이 금색이 아니다. 반짝이기는커녕 칙칙한 황토색이다. “잘 굽고 말린 뒤 고운 모래로 문지르는 ‘폴리싱’ 작업을 해야 반짝인다”며 준비된 말린 컵을 문질러 보인다. 그러고는 끌처럼 생긴 도구로 표면을 긁고 나니 비로소 반짝이는 크리스털 컵이 금빛으로 빛난다.

스카프 프린팅 오차 허용 범위 0.1㎜
가장 커다란 작업대를 가진 이는 실크 프린팅을 하는 프레데릭이다. 그는 가로·세로 90㎝의 스카프 ‘카레’에 색깔을 입히는 장인이다.
‘카레’가 완성돼 매장에 진열되기까지는 약 2년이 걸린다. 디자이너가 6개월에 걸쳐 패턴을 고안하고, 누에고치 300개를 이용해 실크 천을 짠다. 자체적으로 개발한 7만5000여 가지 색깔 중 색상을 선택하고, 한 가지씩 색깔을 프린팅한다. 건조를 하고 결함은 없는지 일일이 살핀 후엔 둥글린 시접을 손바느질한다. 이 중에서 그는 하얀 실크 천을 아름다운 색의 스카프로 변신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작업은 스카프 가운데 작게 쓰여 있는 ‘Hermes’ 로고를 검게 찍어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작은 면적에서 넓은 면적으로 프린팅 순서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색을 찍어낼 때 핵심은 긁개를 미는 힘·속도 조절과 정교함이다. 스케치의 테두리 안에 정확하게 색깔을 집어넣어야 하는데, 에르메스는 10분의 1㎜의 오차만 허용한다. 스크린 위에 잉크를 붓고 긁개를 밀어 한 치도 삐쳐 나가거나 모자라지 않게 프린팅하는 과정이 12번 반복됐다. 이날 스카프엔 12가지 색상이 이용됐다는 뜻이다. 시간관계상 비교적 ‘심플한’ 디자인이 선택된 것이다. 보통 에르메스 스카프엔 평균 30가지, 최대 45가지 색이 이용되고, 리옹에 있는 아틀리에에선 100m 길이의 테이블에서 4명의 장인이 스카프 100장을 동시에 작업한다.

25년 경력의 프레데릭은 말 없이 시연만 하고 그 옆에선 양복을 입은 커뮤니케이션 담당자가 공정을 하나씩 설명했다. “실크 스토리텔러라고 불러 달라”는 카멜 아마두다. 과묵한 실크 장인의 ‘입’이다.
“에르메스는 5년의 수련 기간을 거친 후에야 정식 제품을 만들 수 있게 한다. 장인에겐 손으로 느낌을 익히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마두는 자신도 프린팅을 배웠다고 말했다. “시판용은 만들지 않지만 간혹 시연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담당자 역시 장인의 손이 익힌 감(感)을 모르고서는 어느 것도 말할 수 없다는 곳이 에르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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