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사설

이영호의 ‘몸통’ 주장을 못 믿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8면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기자회견을 자청해 2010년 민간인 사찰 사건과 관련해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파괴하도록 시켰다고 인정했다. 이 사건이 ‘대통령 측근의 권력 비리’ 의혹으로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당시 청와대 관계자로는 처음 입을 연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인정한 것은 사건이 일어난 후 은폐를 위해 하드디스크 파기를 지시했다는 것뿐이다.

 이 사건과 관련된 나머지 의혹들 ▶사찰에 청와대 윗선이 개입했는지 ▶파기한 하드디스크에 숨겨야 할 다른 자료들이 존재했는지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주무관에게 건네진 돈의 명목과 출처 등에 대해선 부인하거나 설명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청와대는 민간인 사찰에 개입하지 않았고, 자신이 증거 은폐의 몸통이며, 윗선은 없고, 장 전 주무관에게 2000만원을 준 것은 ‘선의(善意)’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설명은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자신과 관계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국무총리실 사건에 나서서 자료 파기를 지휘했는지, 또 공무원인 그가 무슨 돈으로 선의에서 자기 부하직원도 아닌 국무총리실 주무관에게 2000만원이나 주었는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깃털인 이 전 비서관이 몸통을 자처해 정권 차원의 꼬리 자르기에 나섰다는 세간의 의구심만 증폭시키고 있다.

 이 전 비서관은 “불법사찰이라는 말이 민주통합당의 음모에 따른 정치공작”이라고 주장했다. 이 시점에 이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는 점에서 정치적 배경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불법 사찰은 분명 범죄행위다. 이 사건으로 기소됐던 7명 모두 징역형을 선고 받은 무거운 범죄다. 이를 단지 정치공작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이성적인 행위가 아니다.

 검찰은 이 전 비서관이 기자회견을 통해 증거인멸과 금품제공을 인정한 만큼 조만간 소환조사한다는 방침이다. 어쨌든 이제 이 전 비서관이 진짜 몸통인지 깃털인지 가려내는 공은 검찰에 넘어갔다. 검찰은 2010년 두 달 동안 특별수사팀에서 수사를 하고도 밝혀내지 못했던 사건의 전모를 이번엔 속 시원히 밝혀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