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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향식 공천제도를 버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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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각 정당의 총선 준비 과정을 보며 우리는 한국에서 정당과 민주주의의 발전은 반비례 관계에 놓여있지 않나 의문을 갖게 된다. 특히 선거마다 반복되는 공천 난맥상과 정당정치 파행은 근본적인 제도 혁신을 더는 미룰 수 없도록 요구한다. 인간집단의 반복 행태는 반드시 제도 요인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과 품격 제고를 위해 현행 위로부터의 공천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해왔다. 의원 후보를 당원·선거구민·시민의 밑으로부터의 ‘참여’와 ‘경쟁’을 통해 ‘선출’하지 않고 대표성 없는 극소수가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지명’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민중의 자기 지배를 뜻한다. 따라서 현행 공천제도는 자기 대표를 선출하는 대의(代議)민주주의를 파괴하여 대대의(代代議)민주주의로 왜곡시킨다.

 또한 위로부터의 지명제도는 대표성 없는 소수가 예비대표를 사전에 결정해 주권자에게 선택을 요구하는 행위로서 직접·평등·비밀·보통 선거의 원리를 위반하는 위헌 요소마저 안고 있다. 예컨대 ‘전략공천’을 이유로 아무 연고도 없는 후보를 이곳저곳 옮겨 공천할 때 어떻게 ‘주민’ 대표라고 할 수 있는가? 특히 ‘공천이 곧 당선’인 지역의 경우 ‘시민주권’과 ‘공개경쟁’이라는 민주적 대표 선출의 근저 요소를 완전히 파괴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재적 절차에 근접한다. 선거는 대표를 밑으로부터 ‘선출하는’ 대표 과정이지 위로부터 지명된 인사를 ‘추인하는’ 대대표(代代表)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의·의회민주주의의 바른 복원을 위해 현행 공천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

 비례대표 선출 방법 역시 전면 혁신해야 한다. 현행 비례대표 선출 과정은 독재시대의 전국구 임명 과정과 거의 같다. 따라서 비례대표 비중의 대폭 확대를 전제로, 분야별·영역별·세대별·지역별·성별로 일정 비율을 배분해 비례대표 후보 당내 경선 과정에 출마하여 후보로 선정된 뒤 다시 권역(圈域)이나 전국 차원에서 득표율에 따른 배분 과정을 거쳐 선출해야 한다.

 현행 공천제도는 의회정치를 자주 파행으로 몰아가기 때문에라도 폐지되어야 한다. 위로부터 공천된 국회의원들은 다음 공천을 위해 의정활동 동안 시민 의사보다는 정당 지도부의 의사를 더 중시한다. 국민 의사는 심각하게 갈라져 있지 않은 사안들에서까지 여야 정치인들이 결사투쟁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즉 반민주적 공천제도로 인해 ‘주민대표’나 ‘국회의원’, 또는 ‘헌법기관’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정당 소속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훨씬 더 강한 것이다.

 실제로 지역 기반이 탄탄하고 의정활동 평가 지표가 아무리 높아도 지도부의 눈밖에 난 의원들이나 반대파 소속 후보들은 거의 공천을 받지 못한다. 현행 공천 과정은 국민대표후보 선출 과정이 아니라 반대파 제거와 자기 세력 확산을 위한 권력투쟁일 뿐인 것이다. ‘선거구민의 지지’를 얻기 위한 본선보다 ‘지도부의 인정’을 받기 위한 예선이 더욱 격렬한 연유도 이로부터 발원한다.

 밑으로부터의 선출을 반대하는 근거는 분명하다. 정당은 임의조직이라서 정당 내부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의조직’인 정당이 ‘국민대표’요 ‘헌법기구’인 의회의 본질·구성·역할을 결정적으로 좌우하기 때문에 이 주장은 틀린 말이다. 즉 국민은 정당이 민주주의 원칙을 수용하도록 요구할 정당할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반민주적 의회 구성 절차가 시민 의사가 반영되도록 전면 개혁돼야 하는 소이인 것이다.

 선거관리체계 역시 전면적으로 혁신할 필요가 있다. 즉 모든 선출직 국가 선거관리는 독립성과 중립성을 확보한 국가 선거관리위원회에 맡겨야 한다. 금번에 일부 지역에서 실시된 경선과 여론조사 과정에서 나타난 불법·파행·동원·편법·꼼수·불복·여론조작 사례들은 기존 정당들이 정당 내 경쟁 과정조차 관리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당내 후보 선출 과정을 의회 구성 절차의 일부로 간주해 독립적인 국가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관리할 필요가 있다. 선거구 획정 역시 국가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담당하면 된다.

 이러한 의회 구성 절차의 혁신이 의회의 규모·역할·책임의 대폭 확대, 상하 양원(예컨대 국가원과 국민원) 분리, 대통령-상원-하원-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주기의 조절과 교차 선출, 의회의 연중 상시 개회, 의원 특권의 대폭 축소 및 세비 감축을 포함한 의회제도 자체의 혁명적 개혁과 함께 한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한층 품격 높고 성숙한 단계로 발전할 것이다. 총선 이후 본격적인 선거-정당-의회 혁신의 논의가 시작되길 기대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