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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원로 홀대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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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덕일
역사평론가

나이 70이 기(耆), 80이 로(老)인데, 일흔 살 이상의 2품 이상 전·현직 관료가 들어가는 곳이 기로소(耆老所)다. 국왕은 환갑을 넘으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영조가 직접 기로소에 들어간 이후로는 관부 서열 1위가 되었다. 평생 공직에 있다가 은퇴한 원로를 국로(國老)라고 하고, 일반 백성 중에서 나이 많은 이를 서로(庶老)라고 한다. 오랜 옛날부터 임금은 국로와 서로를 모시고 잔치를 베풀었다.

 『예기(禮記)』에는 유우씨(有虞氏:순 임금)가 국로는 상상(上庠)에서, 서로(庶老)는 하상(下庠)에 모시고 잔치를 베풀었다고 전하는데, 상상과 하상은 모두 학교를 뜻한다. 하(夏)나라 때는 국로를 동서(東序), 서로를 서서(西序)에 모셨으며, 은(殷)나라 때는 국로를 우학(右學), 서로를 좌학(左學)에서 모셨고, 주나라 때는 국로를 동교(東膠), 서로를 우상(虞庠)에서 모셨는데, 동서·서서, 우학·좌학, 동교·우상도 모두 학교를 뜻한다. 임금이 학생들에게 직접 양로 교육을 시켰다는 뜻이다.

 고려 때는 나이 70에 치사(致仕)한 원로에게 반록(半祿), 즉 녹봉의 반을 지급하기도 했다. 그만큼 평생 나라를 위해 봉사한 것을 높인 것인데 전제가 있었다. 재직 기간 동안 사익(私益)을 챙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송(南宋)의 왕군옥(王君玉)이 지은 『국로담원(國老談苑)』에는 송(宋)나라 구준(寇準)이 재상 생활 30년 동안 집 한 채도 짓지 못했다고 전한다. 처사(處士) 위야(魏野)가 이를 기려서 “관직은 재상의 지위지만 집 지을 땅 한 조각 없네”라는 시를 지어 올렸다. 이 시가 널리 알려져서 송나라가 남쪽으로 쫓겨 간 후 북사(北使:금나라 사신)가 와서 “누가 집 지을 땅 한 조각 없는 재상이냐(孰是無地起樓臺相公)”고 물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현재 여야의 공천을 보면 원로는 대부분 찬밥 신세다. 존경할 만한 원로를 찾기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 신진이라고 다 좋은 것도 아니다. 신선해 보이는 신진도 거의 없다. 변하는 것은 좋지만 그보다 앞서야 하는 것이 옥석(玉石) 구분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는 전국(戰國)시대 위(魏)나라 문후(文侯)의 스승이었던 전자방(田子方) 이야기가 나온다. 길을 가다가 팔려 나온 말을 보고는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나라에서 기르던 말이라는 말을 듣고는 “그 힘을 다 썼는데 늙었다고 버리는 것은 인자(仁者)가 할 일이 아니다”면서 비단을 주고 속(贖)해 주었다. 이를 듣고 궁사(窮士)들의 마음이 비로소 돌아갈 곳을 알게 되었다고 전한다. 원로 우대도 민심 획득의 중요한 수단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