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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병 무산 아픔 딛고 해외시장 눈 돌린다

중앙일보

입력

"이젠 해외로 눈 돌릴 시기입니다. 그간 쌓인 노하우와 기술력을 바탕으로 일본·중국·동유럽 등에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계획입니다."

지난 10월19일 오후에 만난 한글과컴퓨터의 전하진 사장은 연신 ‘해외진출’을 키워드로 새로운 비전과 향후 계획을 밝혔다.

이날은 한컴의 주주총회가 있던 날. 그간 시장의 관심을 한몸에 받던 한컴과 하늘사랑의 합병건이 완전히 철회된 날이었다. 하늘사랑과의 합병은 벤처기업 인수합병(M&A)활성화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터라 이날 합병 무산 소식은 시장 전체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전사장은 “눈물을 머금고 합병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며 “막 고개 들기 시작한 M&A붐에 찬물을 끼얹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날의 철회 결정은 한컴으로서는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내려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난 달 이사회에서 하늘사랑과의 합병을 결정할 당시 매겨진 주식매수 청구권 가격은 1만3천1백10원. 하지만 주총 전날 한컴의 주식가격은 7천원대로 매수청구권과 5천원 이상 차이가 나 주주들의 청구권 행사 요구가 물밀 듯 이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터였다.

주주들의 43%가 매수청구권 행사를 결정해 만약 이대로 청구권에 응할 경우 자그마치 2천9백60억원의 현금이 필요할 판이었다. 한컴이 손에 쥐고 있는 현금은 4백억원. 한컴측으로서는 청구권을 들어줄 방법도, 이유도 없는 상황이었다.

주식매수 청구권이란 회사의 의사결정에 반대하는 주주가 자신이 보유중인 주식을 회사에 되사달라고 요청하는 권리. 이는 대개 회사의 의사결정에 반대할 때 행사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번 경우는 시세차익 때문이라는 점에서 한컴이 느끼는 절망감은 더욱 짙다. 결국 추락한 주가가 합병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주가하락은 주식시장 전체의 문제입니다. 회사의 실적이나 전망과는 큰 관련이 없다고 봅니다.” 애써 그는 주가하락의 원인을 ‘바깥’으로 돌려보지만 그래도 씁쓸하기는 어쩔 수 없다. 한컴이 하늘사랑과의 합병에 걸던 기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늘사랑은 6백30만명의 회원을 보유한 국내 최대의 채팅사이트. 올해 초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e-마켓플레이스 ‘예카’ 등 인터넷 사업을 계획대로 추진해 안정적인 사업기반을 갖추고 기업가치를 올리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회원 데이터베이스를 가진 하늘사랑과의 합병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합병이 물건너 간 상태에서 그가 내놓은 새로운 카드는 해외진출. 한컴의 워드프로세서는 이미 일본과 중국에 수출하고 있으며 동유럽에도 수출을 타진중이라는 것. 인터넷 솔루션도 동유럽 등을 중심으로 적극 판매할 예정이다.

지난 10년간 국내 워드프로세서 시장에서 성장을 거듭하며 충분한 ’담금질’을 거친 덕택에 이제 해외시장에 직접 진출하더라도 충분히 승산이 있을 만큼 단단해졌다는 얘기다.

최근 거듭되는 악재로 전사장은 심신의 피로가 극에 달해 있다. 대주주인 메디슨의 한컴 지분 매각 발표, 새로운 워드프로세서 한글 워디안의 출시 지연, 그리고 출시된 워디안의 거듭되는 오류 발생.

또한 부도위기에 몰린 기업을 국민들이 되살렸다는 ‘국민기업’이라는 명찰이 주는 중압감도 적잖이 어깨를 짓누른다. 올해 초 6만원대에 육박하던 주가는 7천원대를 맴돌며 그를 괴롭히고 있다. “이제 기본으로 돌아갈 때라고 느낍니다. 주가라는 족쇄에 일희일비 않고 좀더 차분해지겠습니다.”

그의 자성(自省)이 더욱 간절하게 들리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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