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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 딛고 교사 꿈 이룬 강신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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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경 위축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강신혜씨. 하지만 끊임없는 도전으로 올해 국어교사의 꿈을 이뤄냈다. 창북중 입학식이 열렸던 지난 2일, 제자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과 마주했다. [최명헌 기자]

“엄마 좀 봐봐~.” 간절한 외침에도 아이는 엄마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시신경 위축으로 태어나면서부터 보지 못했다. 걸음마가 늦어진 것도 앞을 볼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경도 씌웠다. 하지만 병원에서 들을 수 있었던 건 한 마디 뿐이었다. “렌즈가 좋으면 뭐합니까. 눈이 고장 났는데 ….”

강신혜(24)씨 얘기다. 그는 시각장애 1급이다. 어슴푸레한 불빛 말고 그가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책을 읽고 싶어도 점역(點譯·말이나 글을 점자로 고치는 것)을 거쳐야만 했다. 그런 그가 교단에 서게 됐다. 1월 중등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해 지난 2일 서울 창북중 국어교사로 학생들과 마주했다. 꿈을 향한 도전과 시련에 굴하지 않는 오기가 ‘교사 강신혜’를 만들어냈다.

지난달 29일 강씨의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서울 효자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6년여 동안 그의 눈이 되어준 시각장애인 안내견 ‘미래’와 함께였다.

강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학교에서 제공하는 점자책으로 공부를 했다. 학창 시절 1등을 놓친 적이 없다. 상명대 국어교육과를 들어간 것도 일반전형을 통해서다. 학생부 성적이 워낙 좋았던 덕택이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대학에 입학한 그는 수차례 눈물을 삼켜야 했다. 점자로 만들어진 교재가 없어 복지관 30여 곳을 찾아다니며 점역을 부탁해야 했다. “중간고사 전까지 꼭 부탁 드릴게요.” 그가 대학 시절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다.

그가 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활용했던 자료는 수업교재 점역본 20여 권 뿐이었다. 정말 보고 또 봤단다. 2010년 처음 임용고시를 치를 때 책 한 권당 다섯 번을 봤고, 두 번째 도전에서는 10번을 봤다고 했다.

-첫 번째 시험에선 왜 떨어진 건가.

“임용고시는 1차가 필기, 2차가 논술, 3차가 수업 시연과 면접이다. 지난해엔 3차에서 떨어졌다.”

낙방 소식을 접하고 강씨는 ‘내가 장애인이라서 떨어졌나’ 생각돼 한동안 방황했다. 눈이 보이지 않다 보니 수업 시연 과정에서 제대로 된 몸짓 하나 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올해 임용고시 2차 합격 발표가 난 뒤부터는 스스로 시험 문제를 내고, 수업지도안을 짜면서 연구를 거듭했다. 자신을 가르쳤던 맹학교 교사를 찾아가 수업 내용과 방식을 평가받았고, 부모 앞에서 하루 다섯 차례 실전연습을 했다.

-교사의 꿈을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맹학교에서 점자를 배우면서 공부에 흥미를 붙였다. 책을 읽고, 수업 내용을 따라가는 게 재미있었다. 또래들보다 성적이 좋다 보니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이 ‘같은 반 친구들에게 수업 내용에 대해 설명해보라’고까지 했다. 내가 설명한 내용을 친구들이 이해하는 모습에 행복을 느꼈다.”

그가 ‘공부할 수 있게’ 된 데는 어머니 설숙자(48)씨의 뒷바라지가 있었다. “처음에 저는 신혜의 장애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일반유치원에 보냈어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점자를 몰라 고생하는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딸을 위해 서울맹학교와 걸어서 10분 거리의 서울 효자동으로 이사를 했고, 강씨의 등하교 도우미는 설씨의 몫이었다. 등교를 시킨 뒤엔 혼자 점자를 공부했다. 강씨에게 학습지를 풀도록 하기 위해 하루 3~4시간씩 학습지 내용을 점역했다. 고교 시절 강씨가 공부했던 『성문기본영어』도 설씨가 직접 점역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 탓에 지속적으로 병원 치료를 받게 하지 못한 게 한(恨)”이라고 했다.

-고교 시절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비결은 뭔가.

“오기였다. 일반전형으로 대학에 가고 싶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차별받고 싶지 않았다. 일반인과 경쟁해 당당히 대학에 합격한다는 목표가 있었다. 수업시간에 한 번도 자거나 딴짓을 한 적이 없다. 교사가 말하는 내용을 점자로 필기했고, 이를 위해 점자를 빠르게 찍는 훈련도 했다. 시험기간엔 하루 2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고교 시절 ‘자동차 구조’ 부분이 기술과목 시험범위였던 적이 있었는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 15번 정도 꾸준히 읽었더니 외워지더라.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게 나만의 공부 방법이다.”

강씨의 대학 시절 학점은 4.3 만점에 4.12다. 함께 졸업한 같은 과 학생 41명 중 차석이었다. 책의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고 외울 때까지 반복 학습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업 때마다 강의실 맨 앞자리는 그의 지정석이었다. 그는 “교수의 판서나 몸짓을 볼 수 없으니, 말 한마디 한마디에 더욱 집중해야 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대학에 재학할 당시 강씨는 매일 오전 7시면 집을 나섰다. “일찍 일어난 새가 먹이를 낚는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도서관을 자기 집 드나들 듯했다.

“어떤 교사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강씨는 “일반인 선생님만큼만 하고 싶다”고 답했다.

-새 길을 가는 사람 치곤 꿈이 너무 소박하지 않나.

“나는 보지 못한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학생들에게 다가가는 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 부분을 다른 것으로 메웠을 때 비로소 ‘일반적인 교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눈 대신 몸과 마음으로 학생들과 교감하고 싶다. 처음 교단에 서면 모든 게 낯설 것이다. 교실을 돌아다니다 보면 책상과 걸상에 부딪칠 게 뻔하다. 학생들 앞에서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그는 요즘 공부하는 심정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본다. 코미디나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유행어를 외우기 위해서다. 그 자리엔 항상 어머니 설씨가 있다. 어머니에게 유행어를 구사하면서 개그맨들이 어떤 동작을 하는지를 물어 그 동작을 따라 한다. ‘학생들과 교감할 수 있는 선생’이 되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학생들도 우스꽝스러운 제 모습을 보면서 손가락질하겠죠. 하지만 6개월, 1년이 흘렀을 때 ‘그래도 저 선생님은 나름 노력하네’라는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언젠가는 학생들이 제 진심을 알아주겠죠.”

안내견 미래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향하는 강씨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카페 옆 입간판에 새겨진 광고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빛보다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빛을 담고 싶습니다.’ 그가 남기고 간 글귀인 듯했다.

글=최석호 기자
사진=최명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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