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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혼란'보다 '실명의 폭력' 경계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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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익명성은 이중적이며 역설적이다. 익명성이 보장돼야 사회적 약자의 의사 표현이 활성화될 수 있는 반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이버 폭력 역시 이를 기반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더 이상 소수의 학술 네트워크나 취미 생활의 영역이 아니라 현대인의 일상 자체가 되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문제점 역시 다양한 영역에서 더욱 빈번하게 발생한다.

인터넷을 둘러 싼 음란성(정확하게 표현해서 성적 표현물에 대한 가치 판단) 논란, 사이버 성폭력 및 개인 정보 유출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최근 인터넷을 통한 사회적 의사 표현이 다양하고 빈번해지면서 사이버 스페이스 내의 ‘익명성’ 문제가 자주 제기되고 있다.

사실 인터넷 초창기만 하더라도 사이버스페이스 내의 ‘익명성’은 인터넷의 대표적인 장점으로 지목됐었다. 일상 공간에서 가지는 주체의 한계가 사이버스페이스 내의 익명성을 기반으로 더욱 다양하게 표출될 수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현실 공간의 위계 구조를 해체하고 인터넷 문화의 다양성을 창출하는 토대가 되었다. 익명성이라는 인터넷의 특성을 계기로 오프라인에서는 할 수 없었던 사회적 약자들의 다양한 불만과 의견들이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자유롭고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인터넷의 활성화와 함께 익명성에 근거한 사이버 폭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책임질 수 없는 유언비어들, 사이버 성폭력과 스토킹의 활성화, 그리고 불성실한 의사표현 등이 인터넷의 익명성에 기반한 채 더욱 빈번하게 발생되고 있다.

이미 정치적 이슈와 관련된 사이트에는 익명성을 이용한 일명 ‘게시판 도배’가 성행하고 있으며, 자신과 입장이나 이해 관계가 다른 사람에게 익명의 스팸 메일을 발송해 곤욕을 치르게 하는 사이버 테러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최근에는 게시판 실명제나 나아가 사이버스페이스 내에 실명제가 도입돼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추세다. 오프라인에서와 같이 주체의 사회적 정체성이 확인될 수 있는 실명제를 통해 책임질 수 있는 논쟁과 의사소통이 인터넷에서도 필요하다는 주장인 셈이다.

익명성은 의무 아닌 선택이자 권리

하지만 익명성은 인터넷 혹은 사이버스페이스만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익명성 자체는 사회적으로 존재해 온 자기 표현의 오래된 형태이며, 개인이 지켜야 할 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선택이자 권리이다. 자신이 ‘아무개’라고 소개되는 것, 혹은 그 소개를 통해 표현될 수 있는 자신의 정체성은 개인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익명성에 대한 논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근대 규율 사회 속에서 지나치게 실명제에 익숙해져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실명제라는 것은 개별 주체가 사회 질서로부터의 호명에 응함으로써 투명함 혹은 정직함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사회적 통제와 규제가 실현될 수 있는 개별 주체의 정보 역시 쉽게 제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개별 주체에게 주민번호를 매기고, 각종 개인 정보를 국가나 중앙 정부가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과정은 근대 국가 권력에 의한 감시나 통제, 그리고 동원 메커니즘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전제인 것이다.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실명을 사용했을 때 상대방을 더욱 믿고 신뢰할 수 있다’, 혹은 ‘익명을 사용하는 사람은 무언가 의심스러운 사람이다’라는 이데올로기 속에는 근대 감시 사회와 규율 체계가 무의식 중에 훈육되어 있다.

더욱이 주민등록증 번호, 각종 학연·지연의 출신 성분, 성적 정체성 등 사회적 질서 체계가 발달돼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문제점은 매우 심각하다. 한국 사회에서는 익명성에 의한 혼란보다는 실명제에 의한 폭력이 더욱 심각하다. 단적인 사례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매스미디어의 대부분은 실명에 의해 그 내용이 구성되고 전달된다.

물론 여기서 실명은 단순히 이름 석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 이름 혹은 이름 뒤에 붙은 사회적 직함을 포함하며, 이는 그 사람의 사회적 신분과 권력을 보증하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전달되는 내용은 그 질적 가치와 무관하게 하나의 전문성 혹은 능력으로 보증된다.

따라서 신문 지면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글들이 독자투고와 별다른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무슨 칼럼’이라는 이름 하에 과도한 사회적 영향력을 획득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명제에 숨어 있는 상업성

더욱이 인터넷 실명제가 최근 들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현상 속에는 또 다른 이유가 숨어 있다. 바로 ‘책임감 있는 의사소통’, ‘투명한 사이버 커뮤니티 구현’이라는 허울 좋은 주장의 배후에 상업적인 목적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정보사회의 길목, 더욱이 인터넷을 매개로 하는 전자상거래에서 이윤창출의 가장 핵심적인 대상은 바로 개인정보다. 이미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개인정보 유출은 바로 개인의 사적 정보를 돈으로 사고 파는 과정에서 이윤이 창출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실명제를 통한 개인 정보의 신뢰성(경제적 활용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이며, 동시에 이는 개인 정보의 경제적 가치와 비례한다. 즉 실명제로 확보된 개인 정보의 가치는 정보 사회 및 전자상거래에 있어서 돈과 직결되는 것이다.

대다수의 무료 사이트가 경제적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더욱이 실명제로 회원 등록이 되는 사이트가 익명성에 기반한 사이트와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 가치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개인 정보의 가치 덕분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 제기되고 있는 인터넷 실명제의 필요성은 인터넷 의사소통이나 커뮤니티의 가능성보다는 상당 부분이 경제적 이윤의 거점이 되는 개인 정보 확보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개인정보의 데이터 베이스는 필연적으로 개인 정보 유출이라는 악순환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다. 인터넷의 익명성은 사실 매우 이중적이며, 동시에 역설적이다. 익명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인터넷은 사회적 약자의 의사 표현을 활성화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이버 폭력 역시 이를 기반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은 인터넷이나 사이버스페이스의 개인 정보를 실명화 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실명제의 폭력 속에서 사회적 정체성이 철저하게 권력화되어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실명제 뒤에 도사리고 있는 개인 정보 유출의 위험이나 상업화라는 문제를 고려한다면 현재 인터넷의 익명성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터넷 공간에서 반복되고 있는 언어 폭력이나 무책임한 의사 표현은 익명성과 실명제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아니라 사이버스페이스 내의 이상적인 의사소통 구조를 실현하기 위한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노력을 통해 개선돼야 한다.

자신의 의견만큼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문화, 사회적 위계 서열에 근거한 판단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 자체를 받아들이는 문화, 나아가 다양한 차이를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한 성숙한 네티켓 문화의 형성은 결코 익명과 실명의 문제가 핵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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