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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오, 인생은 한 편의 잔혹극

중앙일보

입력

"누가 굴비를 낚겠는가. 생선이면서 생선도 아닌 것을 어디 가서 낚겠는가. 그저 낚싯대 하나 드리우고 낚이지도 않을 굴비를 상상하며 나름의 생각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 그게 내가 상정한 영화에 대한 글쓰기의 모습이다."(〈굴비낚시〉17쪽)

김영하 님의 영화산문집〈굴비낚시〉(마음산책 펴냄)
에는 그가 2년여 동안 낚은 열여덟 편의 맛깔스런 '굴비'가 한 두름 엮여 있다. 김영하 님에게 영화는 '한때 조기였으나 손질하는 방식에 따라 값이 천차만별인, 적당히 가공된, 생선이면서 생선이 아닌 굴비' 같은 것이다.

'영화가 비린내 나는 현실 그 자체도 아니고 그렇다고 땅콩처럼 간편하게 털어 넣을 수 있는 스낵도 아닌 것'처럼 이 책은 영화 비평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화를 빌미로 자신의 신변잡기를 지루하게 늘어놓는 에세이집도 아니다. 영화에 얽힌 다양한 상념과 삶에 대한 은유가 김영하 님 특유의 거침없는 입담과 유머감각으로 펼쳐진다.

시인 유하 님의 지적 대로 '김영하적인 것들로 가공된 영화'의 중심에는 홍상수 감독의 작품이 자리잡고 있다. 지식인의 저열함과 이중성을 드러내는〈강원도의 힘〉을 보고는 '오, 빌어먹을, 들켰다'는 고통스럽지만 유쾌한 자의식을 토해낸다.

또〈오! 수정〉은 '한 번 달라는 남자들과 쉽게는 줄 수 없다고 버티는 여자의 이야기'라고 딱 잘라 말하면서도 사랑에 대해 의심하게 만드는 영화라고 평한다. 사랑이 혹시 호르몬의 이상 분비 때문에 빚어진 정신착란이 아닐까 하는. 그래도 현실을 잊게 하는 달콤한 영화보다는 지독한 냉소가 있는 홍상수의 영화가 좋다고 한다. 불쾌감이 아교처럼 쩍쩍 달라붙어도 말이다.

"오겐키 데스카? 와다시와 겐키 데스." ("잘 지내고 있어요? 저도 잘 지내요")
여주인공 히로코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영화〈러브레터〉. 김영하 님은 엇갈리는 등장인물들의 운명을 '사랑'이라는 바이러스에 빗대 표현한다.

사랑은 바이러스 같다는 것, 그래서 프로그램 연산 불능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면 의심나는 파일은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것. 그래도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누구나 눈 덮인 산에 올라가 소리를 지를 수도, 수신인 없는 편지를 부칠 수도 있는 것이다.

김영하 님은 '성룡을 좋아한다'는 인터뷰 내용 때문?늑陋킬?혹은 나쁘거나〉의 류승완 감독에 홀딱 반하기도 하고〈쉘 위 댄스〉에 대해서는 '새마을 운동이여 안녕'을 외치기도 한다. 근대화의 깃발 아래 쾌락의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댄스홀을 돌려주라는 의미다.

〈시네마 천국〉의 영화음악만 들어도 '이수일과 심순애'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감상에 젖는가 하면, 100% 디지털 기술로 만들었다는〈토이스토리 2〉에서는 오히려 인간 육체의 유한성을 짚어내기도 한다.

미국 중산층 가정의 가식을 드러낸〈아메리칸 뷰티〉에 대해서는 '나는 미학적 마조히스트'라며 능청을 떨기도 한다. 김영하 님의 영화라는 굴비 낚시는 영원한 서정을 자극하는〈대부〉로 피날레를 맺는다.

"영화는 우리 인생처럼 막을 내린다. 마이클이 앉아 있는 어두운 방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클라이맥스도 카타르시스도 없다. 그것마저 우리 인생을 닮았다니, 〈대부〉는 한 편의 잔혹극이다."(이 책 161쪽)

이제 책을 덮고〈부기 나이트〉의 롤라걸처럼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비디오 가게로 달려가자. 김영하 님 스스로 '이 영화들을 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아무런 배려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사뭇 비장한 선언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Joins 오현아 기자 <perun@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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