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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엔 한반도 사랑 유전자가 흘러요"

미주중앙

입력

백인이 흔한 올드 팝 한곡 못외운다. 대신 북한의 결핵환자 500여명의 이름은 줄줄이 읊는다. 평안남도에 사는 수정(11)이가 오늘 결핵약은 먹었는지 점심은 거르지 않았는지 살뜰히 챙긴다. 대북 지원단체 유진벨 재단의 스티브 린튼(한국명 인세반.62) 회장의 핏속에는 100여년을 이어온 '한반도 사랑' 유전자가 흐르고 있다. 그는 1895년 조선 땅을 밟은 유진벨 선교사의 4대손이다.

조상의 어진 마음을 이어받은 그는 재단 창립 이래 17년간 25만명에 달하는 북한 결핵환자들을 살렸다. 치료비만 3500만달러에 달한다. 꽁꽁 얼어붙은 북한이 쌍수들고 그를 환영하는 이유다. 그래서 주류언론들은 그를 '북한이 가장 신뢰하는 미국인'이라고 부른다.

린튼 회장이 최근 중앙일보를 방문했다. 한인들에게 북한 결핵환자 지원을 부탁했다.

한국어가 유창한 그와 우리말로 한반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최근 북한을 다녀오셨다. 결핵환자 치료 현황은.

"지난 10월에 다녀왔다. 4년 전부터 난치결핵인 다제 내성 결핵환자 치료에 집중하고 있다. 지금까지 100여명이 완치됐고 현재 6개 보건소에 500여명이 격리 치료를 받고 있다. 서서히 치료 체제가 안정되고 있어 다행스럽다."

-치료가 힘든 병이라던데.

"일반 결핵약에 내성을 가진 난치결핵이다. 유엔조차도 포기한 병이다. 약값도 일반 결핵약의 150배로 비싸다. 외부 지원없이 북한내에서 치료는 사실상 어렵다. 다제내성환자는 4000명으로 추산하는데 그중 치료받는 환자는 5%밖에 안된다."

-어떻게 치료하나.

"18개월 이상 보건소에 격리되어 약을 먹고 치료받는다. 환자 입장에서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매일 2차례 16가지 알약을 삼켜야 한다. 한 주먹이다. 어지럽고 감정 기복이 심한 부작용도 심해 도중에 포기하는 환자도 많다."

-결핵환자를 돕는 일이 효과적인 대북 지원이라고 했다.

"투명하다. 쌀은 다른 용도로 쓰일 수 있지만 결핵환자 약은 환자 맞춤용으로 제작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 환자가 복용할 수 밖에 없다. 한번에 6개월치를 전달하는데 박스 포장에 환자의 이름과 번호 후원자의 이름이 표기된다. 후원자가 환자를 알고 돕는 1대1 결연방식이다."

-후원은 어떻게 하나.

"환자 1명 치료하는데 드는 연간 약값이 2000달러다. 한달에 200달러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수 있다. 특히 한 교회가 환자 1명을 책임져 주신다면 더욱 효과적이다. 남가주교협에서도 적극 지원해주시겠다고 약속했다. 꺼져가는 생명들을 살리는데 도와달라."

-가슴 아픈 경험은.

"갈 때마다 가슴 아프다. 돌아온 뒤엔 더 아프다. 이번에 보고 온 환자중 다음에 가면 몇명이나 살아 있을까 걱정이다. 어떨 땐 환자들에게 약을 주지 못해 화가 나기도 한다."

-보람을 느낀 때는.

"우린 완치한 환자 퇴원식을 '졸업식'이라고 부른다. 가족과 격리된 채 오랜 기간 치료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봄 첫 졸업식에서 3년간 약을 먹고 겨우 나은 30대 여성이 있었다. '이제야 내 아들을 안아볼 수 있겠다'면서 울더라. 나도 울었다."

-바쁘게 다닌다. 힘들지 않나.

"결핵은 예방약이 없다. 환자들과 얼굴을 마주봐야 하니 항상 감염 위험을 안고 있는 셈이다. 말라리아에 걸려 고생한 적도 있다. 하지만 두렵기보다 치료해주고 싶은 생각부터 든다."

-왜 한국이고 북한인가.

"운명과 필연이다. 선교사 부모에게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것이 운명이었다면 북한을 돕는 일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필연이다."

-애창곡은.

"끝까지 부를 수 있는 한국 노래는 '나의 살던 고향은…(고향의 봄)' 정도다. 끝까지 외우는 올드 팝도 없다. 나는 19세기 사람이다. 3살 때 한국에 건너와 전라남도 순천에서 자랐다. 촌동네라서 TV나 라디오가 없었다. 대학교(연세대) 입학전까지 시골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갈등을 초월한 남북 교류의 틀을 만들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나 이념에 좌우되는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 사실 우리 재단은 북한에 사랑을 전달하는 택배회사 역할만 해야한다. 내가 할일이 없는 세상이 한반도에 왔으면 좋겠다."

-언제 통일이 될 것 같나.

"한국 사람들은 '리본 커팅식'을 통해 단번에 통일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아마도 그런 날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큰 스위치를 올려 통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수만개가 넘는 작은 남북 교류의 스위치들이 On으로 켜져 꺼지지 않는 날 통일은 자연스럽게 온다."

그의 한국 성은 '인(印.도장 인)'씨다. 국어사전에서 인의 뜻은 17개다. 7번째 뜻에서 시선이 멎었다. '지울 수 없게 새겨진 자취'라고 한다. 공교롭게도 북한어다.

▶도움주실 분:(626)824-8211 임호 부회장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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