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와10시간] 전도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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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누군가 악, 하고 소리만 한번 지르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했다. 서울 옥수동 산동네. 새 영화〈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포스터 촬영을 위해 전도연은 낡은 5층 연립주택 옥상에서 종이 비행기를 날리고 있었다.

오전 11시. 날은 어두웠다.

#1. 상대역인 설경구는 예의 무심한 듯한 표정으로 옥상 난간에 걸터 앉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매번 아주 약간 다른 포즈를 취하도록 스무 번쯤 요구했고, 포즈마다 수십 번도 더 셔터를 눌렀다.바람이 불었다.종이 비행기를 하늘로 밀어 올린 옥수동의 바람은 그녀의 짙은 갈색 니트의 굵은 올 사이로 빠져 나갔다.

"즐거워요. 〈해피 엔드〉를 끝내고 한 9개월쯤 쉬었나요. 일하는 게 좋아요. 아, 포스터 촬영요. 물론 힘들긴 하죠. "

세트 정리 사이사이 빈 시간의 토막 대화에서 전도연은 "재미있어요" 를 연발했다.이런. 똑같은 포즈와 표정으로 수도 없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고역이겠는가. 스태프들도 하나 둘 지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데 정작 그녀는 아무런 내색이 없다.

옥상에 심어놓은 방울 토마토가 몇 개 빨갛게 익었다.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이 그 옆에서 시들고 있었다.깨진 빈 화분에는 10㎝쯤 빗물이 고여있다.

" 〈해피 엔드〉의 연기가 너무 강렬했나요. 계속 강한 캐릭터, 온몸을 던지는 역할만 출연 제의가 들어오는 거예요. 많이 생각한 끝에〈나도 아내가…〉를 택했어요. "

그녀의 입에서〈해피 엔드〉라는 말이 나오자 불현듯 최민식과 주진모와 그녀가 보여준 그 광기 어린, 그러나 바로 옆에서 일어난 일처럼 어지럽던 그 치정과 살인의 드라마가 새삼 생생해진다.

"특별히 어려운 건 없어요. 캐릭터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일도 별로 없고. 영화 개봉 안해도 좋으니 촬영을 계속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하하. "

개봉을 안해도 좋다니, "그럼 영화사는 망하게요" 라고 되묻자 "그러게 말이에요" 라며 깔깔거린다.대화는 주저없고 웃음은 활기차다.조금의 망설임도 없다.자신감이다.좋다.

#2. 인터뷰를 위해 자료를 챙기다 깜짝 놀랐다.어라, 출연한 영화가 네편밖에 안되네. 한 7~8편은 되지 않았나?

"예, 그런 이야기 종종 들어요. 아마 출연 영화마다 화제가 되고 흥행도 성공했고, 또 이전에 방송 활동을 많이 해서 그런 인상이 남지 않았나 싶어요. " 그럴 것이다.

1997년〈접속〉을 시작으로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은 모두 흥행에 성공했고 좋은 평을 받았다. 그 드문 연속적인 성공이 그녀의 인상을 강하게 한 것이다.그리고 그 성공은 완벽을 추구하는 그녀의 열정적인 연기에 크게 힘입었다.

3시간이 넘는 작업 끝에 옥수동 촬영이 끝났다.다른 포스터를 찍기 위해 이동한 과천 주공아파트 단지는〈나도 아내가…〉의 주요 촬영지다.

보습학원 강사 전도연은 은행 직원 설경구를 짝사랑하지만 차마 말을 못한다.설경구는 그녀의 마음도 모른 채 다른 여자와 연애를 하고….

#3. "잔잔한 영화예요. 정말이지 소소한 일들을 통해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을 전합니다. 제목의 '아내' 는 남편의 반대말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을 뜻해요. "

아파트 단지 한켠의 작은 쉼터에서 다시 촬영이 시작됐다.낡은 벤치에서 비를 피하던 중 설경구가 그녀의 안경에 묻은 빗방울을 닦아주는 모습이다.살수차(撒水車)는 사방 30평 남짓한 쉼터에 계속 비를 뿌려댔다.촬영 중간 중간에 작은 자전거를 탄 아이들이 그 빗속을 즐거워라 지나다녔다.

촬영은 좀처럼 끝날 줄 몰랐다.시간은 가을 오후의 시냇물처럼 흘러갔다.밤 8시가 넘어서야 OK! 사인이 떨어졌다.물을 모두 뿌린 살수차는 가벼워진 몸으로 돌아갔다.

"다른 일요? 생각 안 해봤어요. 결혼하고, 이제 됐다 싶을 때까지 계속 해야죠. " 글쎄, 이 욕심 많은 연기자에게 '이제 됐다' 싶을 때가 언제쯤 올까.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는 양수경의 '외면' 을 흥얼거리다 다음 촬영을 위해 돌아서는 전도연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전도연은......

1973년 서울 생. 광고 모델로 일하다 93년 MBC 탤런트로 특채됐다.〈우리들의 천국〉〈종합병원〉〈젊은이의 양지〉등 드라마에서 좋은 연기를 보였다.

97년 한석규와 공연한〈접속〉이 첫 영화. PC통신상의 사랑을 그린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그녀에게 대종상과 청룡영화상 최우수 신인 여우상을 안겨줬다.

이듬해 깡패 두목과 여의사의 사랑을 그린〈약속〉으로 백상예술대상 인기상을 수상하고 1백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면서 흥행성과 연기력을 모두 갖춘 여배우로 입지를 굳혔다.

지난해에는〈내 마음의 풍금〉에서 열일곱살의 산골 마을 늦깎이 초등학생 역을 훌륭히 해내면서 "어떤 역을 맡겨도 소화할 수 있는 배우" 라는 호평과 함께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어〈해피 엔드〉에서는 완전히 이미지를 바꿔 몸을 사리지 않는 러브신과 극적인 연기로 또 다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가장 기억에 남는 드라마로〈종합병원〉을 꼽았다. "〈약속〉 의 여의사보다〈종합병원〉의 간호사가 내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는 게 그녀의 말이다.

"별로 좋아하지 않던 서태지를 최근 '울트라맨이야' 를 듣고 좋아하게 됐다" 고. 배우로서 부족한 점을 묻는 질문에 "나름대로 신체적 콤플렉스도 있고 아쉬운 점도 많지만 그런 부족한 점 때문에 더 열심히 연기한다" 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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