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위크]밀로셰비치 운명의 시간

중앙일보

입력

지난 9월 24일 밤, 세르비아의 야당 대통령 후보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는 혼자 사무실에 머물면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사무실 밖에서는 소수의 측근들이 세르비아 민주야당(DOS)
당사 안을 배회하면서 초조하게 국영 TV를 시청하는가 하면 전국 투표소 현장에 나간 당원들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투표 결과는 맨 먼저 코소보의 세르비아계 거주지에서 나왔다. 예상대로 이 지역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자정께 분위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베오그라드·니스 및 여타 도시들로부터 조금씩 들어온 선거 결과는 DOS 당원들을 흥분시켰다. 유고슬라비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코슈투니차가 밀로셰비치를 대파(大破)
한 것이었다. 25일 오전 4시, 코슈투니차는 당사 접견실로 들어가 기자들에게 “이는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 그리고 유고 국민들의 위대한 승리다. 자유의 새벽이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지난주 세르비아인들이 투표장으로 몰려가 사상 최고의 투표율을 기록하면서 유고 전역은 집단 최면에서 깨어나고 있는 듯했다. 지난 13년간 유고를 통치해 온 밀로셰비치는 한 달 전만 해도 외부세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코슈투니차에게 패배했다. 온건파 민족주의자인 코슈투니차는 청렴하기로 명성이 자자하고 코소보전쟁 당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군의 공습에 반대함으로써 세르비아의 모든 계층으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야당 선거감시단의 집계에 따르면 코슈투니차는 51%, 밀로셰비치는 36%의 지지를 얻었다. 한 고위 미국 관리는 “(이로써)
밀로셰비치 정권은 본격적으로 쇠퇴일로에 접어들었다. 정말 대단한 일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비교할 만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밀로셰비치는 생존의 명수다. 밀로셰비치 정권이 붕괴하리라는 예측은 시간이 지나면서 섣부른 판단이었음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밀로셰비치의 첫번째 대응조치는 신속히 나왔다. 26일 밤 정부 통제하의 연방 선거관리위원회는 코슈투니차의 선거 승리 주장을 부인했다. 선관위는 코슈투니차가 48%, 밀로셰비치가 38%를 얻었다며 10월 8일 결선투표를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야당 지도자들은 이 집계 결과를 사기라고 일축하고 전국적인 항의 시위를 촉구했다. 그러나 이들은 총파업 계획을 놓고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다가 곧 기세를 잃었고 결선투표 보이콧 문제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듯했다. 그 사이에 밀로셰비치는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었다. 밀로셰비치의 전기 작가 슬라볼류브 듀키치는 “자신이 가장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 (밀로셰비치는)
비로소 진가를 발휘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거리의 분위기는 낙관적이었다. 27일 밤 20만 명의 군중이 베오그라드의 공화국 광장에 운집, “세르비아를 구하라. 밀로셰비치는 자결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반정부 시위는 니스·노비사드 및 여타 도시로 확산됐다. 사상 최대의 反밀로셰비치 시위였다. 한편 밀로셰비치 추종자들의 사기는 저하됐다.

한 정부 고위관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밀로셰비치의 패배로 내가 일자리를 잃게 된다 해도 상관없다. 이제는 야당이 힘을 얻었고 그들이 승리할 것이다. 다만 이같은 권력투쟁이 폭력사태로 번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밀로셰비치는 공식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는 강경파 공산주의자인 아내 미랴나 마르코비치와 함께 베오그라드의 한 안락한 별장에 칩거하면서 조심스럽게 생존 전략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신이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안다. 권좌에서 물러나면 학정(虐政)
의 희생자들에게 살해당하거나 헤이그 국제전범재판소의 전범 재판에 회부되기가 쉽다. 그는 가두시위가 흐지부지 끝나리라 믿고 결선투표를 강행해 부정 선거를 획책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러나 코슈투니차는 결선투표 불참 의사를 밝혔다. 그렇게 되면 유고슬라비아에는 탱크를 앞세운 대통령과 군중을 앞세운 대통령 등 두 명의 대통령이 생길 것이다. 야당인 사회민주연합(SDU)
의 당수 자르코 코라치는 “(그러면)
우리는 권력의 대치상태 속에서 혼란의 시대를 맞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밀로셰비치는 코슈투니차의 승리를 인정하되,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의회에서 자신을 총리로 선출하게 만드는 방안을 택할 가능성도 있다. 밀로셰비치는 또 몬테네그로에 혼란을 초래한 다음 계엄령을 선포할지도 모른다. 밀로셰비치가 자발적으로 권좌에서 물러나 망명길에 오르리라는 시나리오는 실현 가능성이 가장 적다.

서방 지도자들은 그를 퇴진시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세르비아인들의 용기를 찬양하면서 밀로셰비치가 축출된다면 경제제재 조치를 해제하겠다고 약속했다. 서방은 러시아의 중재로 밀로셰비치를 권좌에서 밀어내려 하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해 코소보의 세르비아군 철수 협상을 중재한 바 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지금까지 親밀로셰비치 노선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러시아 관리들도 결선투표를 지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밀로셰비치 정권 붕괴의 발단은 1998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는 측근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두 인물, 세르비아 정보부장과 세르비아 국영 라디오·TV 방송 책임자를 파면했다.

그후 밀로셰비치는 점증하는 국민들의 불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준 아내 마르코비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코소보 전쟁이 발발했다. 이는 세르비아인들이 파괴적인 밀로셰비치의 정책들을 처음으로 체감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NATO의 공습이 끝나고 한 달 뒤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대다수 세르비아인들은 밀로셰비치가 권좌에서 물러나길 바랐다. 밀로셰비치는 이런 여론을 무시했다. 그 여론조사에는 당쟁을 일삼는 부패한 야당 지도자들이 오히려 자신보다 민심을 더 잃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던 만큼 밀로셰비치는 그릇된 안도감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민심을 잘못 읽은 밀로셰비치는 7월 조기 총선을 실시했다.

티토 정권 시절 베오그라드大에서 해직된 바 있는 법학교수 출신의 반공주의자 코슈투니차는 1989년 최초의 反밀로셰비치 정당을 창당했다. 이번 선거에서 관영 매체와의 접촉이 거부된 그는 세르비아 전역을 돌며 가가호호 방문식 선거유세를 벌였다. 對세르비아 경제제재의 해제와 세르비아의 유럽 편입을 촉구하는 그의 유화적 연설은 가는 곳마다 호응을 얻었다.

이제 밀로셰비치의 운명은 시민불복종 운동과 파업을 버텨내고 軍 통수권을 유지하는 데 달렸다. 시위가 확대되며 지속될지 여부는 확실치 않았다. 29일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집회에는 불과 2만 명이 모였다. 야당측은 대규모 시위 끝에 선거와 관련해 밀로셰비치의 양보를 얻어냈으나 내분으로 힘을 잃었던 1996∼97년 겨울의 해프닝이 재발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밀로셰비치가 기대하고 있는 시나리오다.

코라치는 “밀로셰비치는 이번에도 관망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그는 시위 열기가 곧 잠잠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좌에서 물러날 경우 치러야 하는 대가를 감안할 때 밀로셰비치가 쉽사리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다.(Joshua Hammer 베를린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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