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과 미래 비전이 빠진 ‘遺産 정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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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호 02면

참 부럽다. 시진핑(習近平·59) 국가부주석의 닷새간의 미국 방문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감정이다. 시 부주석의 절제된 화법과 행보를 보면서 중국의 차기 지도자 육성 방식을 주목하게 된다. 서구 시각으론 중국의 정치 민주화와 인권에 문제가 많다지만 ‘중국에는 중국의 길이 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아서다.

이양수의 세상탐사

올 10월께 차기 권력자(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될 시진핑은 26년 전 잠깐 머물렀던 아이오와주의 시골 마을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43억 달러(862만t) 규모의 대두 구매계약을 체결했다. 미·중 농업 관계자 15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선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여긴다)”이라며 윈윈 게임을 강조했다. 30여 년 전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즐겨 썼던 말이다. 17일엔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국 프로농구 경기를 관람했다. 시진핑의 좌우엔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LA 시장이 노타이 차림으로 나란히 앉아 ‘친구’ 이미지를 연출했다. 시진핑으로선 무역 불균형, 티베트 사태, 인권 탄압, 군사력 경쟁 등 온갖 악재 속에서 국제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한 셈이다.

중국의 권력자가 국제무대 데뷔 장소를 미국으로 정한 건 덩샤오핑(당시 74세)이었다. 덩은 1979년 카우보이 모자를 쓴 채 로데오를 관람하며 미국인의 마음속에 깔린 ‘죽의 장막’ 이미지를 녹였다.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미국의 자본·기술·시장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중국 지도부는 이후 30여 년간 경제발전 3단계(溫飽-小康-大同)의 미래 비전을 정해 놓고 외교전에 임했다. 왼손엔 공산당 일당독재, 오른손엔 경제발전이란 두 개의 원칙을 쥐고서다. 이제 중국은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도약해 G2(미국+중국) 시대를 열었다. 그럼에도 시진핑은 할 말은 하되 극도로 절제된 외교적 수사를 구사했다.

우리도 4·11 총선이 끝나면 차기 대권을 노리는 여야 지도자들이 주변 4강을 방문하며 외교·안보 역량을 과시할 것이다. 87년 직선제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대선 출사표를 던진 뒤 또는 대통령 취임 뒤 빠짐없이 밟아온 수순이다. “반미(反美)면 어때”라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취임 석 달 뒤인 2003년 5월 미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들의 방미 때마다 ‘굴욕 외교’니 ‘조공 외교’니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잦은 말 실수와 함께 외교 관례를 깨는 사건도 빈번했다.

4·11 총선을 앞두고 민주통합당과 친노(親盧) 세력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이명박 정부에 실망한 민심을 등에 업고 부산·경남(PK)과 수도권에서의 약진을 기대한다. 한명숙 대표는 물론 문재인 상임고문, 문성근 최고위원은 ‘노무현 정신의 계승’을 기치로 내세운다. 그런데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이 그토록 공을 들였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제주 해군기지 건설엔 딴 목소리를 낸다. 선거 득표에 도움이 된다면 또 무엇을 뒤집을지 모르겠다. 바둑 세계에선 ‘묘수를 세 번 두면 진다’는 격언이 있다. 정석(定石)과 원칙의 힘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선 새누리당도 마찬가지다. 박정희 시대의 유산을 물려받은 박근혜 비대위원장 역시 보수 색깔을 지우느라 여념이 없다.

정치인의 미래 어젠다는 국격을 말해준다. 특히 외교·안보 분야에서 한번 뱉어놓은 말들은 다시 주워 담기 힘들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최고경영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머릿속에 그린 5년 뒤, 10년 뒤의 비전”이라고 말했다. 한·미 FTA 재재협상과 폐기론을 주장하는 건 야당의 선택이다. 다만, 그런 사태가 벌어진 뒤 한·미동맹과 시장 개방, 경제정책 등 국정 전반의 정책 대안은 무엇인지 소상히 밝혀야 한다. 남북관계는 또 어떻게 할지 묻고 싶다. 외교·안보 분야에까지 포퓰리즘을 악용하는 건 국익을 외면하는 처사다.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든 박정희 유산을 물려받든 국정의 원칙과 미래 비전이 살아있어야 한다. 선거 때마다 자기 당 출신의 집권자가 했던 약속을 번복하다간 나라 밖에 나가서 웃음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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