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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난 사랑, 어긋난 사랑 이야기 ‘첨언밀어’

중앙일보

입력

"나는 실연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실연의 상처를 달래려 낯선 섬에 여행 온〈첨언밀어 甛言密語〉의 여주인공은 자신이 묵고 있는 민박집 천장에 이렇게 쓴다. 그래, 어쩌면 멜로드라마 속의 인물들이라는 게 한 마디로 말하자면 바로 그런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실연하기 때문에 존재하고 또 실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들. 그들은 사랑은 실패했을 때 오히려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정서를 조율한다. 조숭기 감독의 〈첨언밀어〉는 그런 인물들을 통해 가슴저린 사랑/아름다운 사랑을 이야기하는 정통 멜로 영화다.

저돌적으로 전진하는 카메라와 꽤 거친 액션 장면을 가지고 영화는 과격하게 걸음을 내딛는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영화는 톤을 낮추고 나지막이 사랑의 밀어를 속삭인다. 사귀던 남자 친구로부터 실연을 당한 후 어느 외딴 섬을 찾은 맨디(몽가혜). 그녀는 캄수이(고천락)의 민박집에 묵게 된다. 캄수이는 맨디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에게 이끌리지만, 벙어리인데다가 수줍기만 한 이 순진한 청년은 맨디에 대한 자신의 속마음을 보여주지 못한다. 맨디는 곧 섬을 떠나지만, 얼마 후 다시 그 곳을 찾아오고, 맨디와 캄수이는 자연스럽게 가까이 지내게 된다. 하지만 캄수이는 어느 날 맨디가 던진 말을 듣고는 어쩔 줄 몰라 한다. 바닷가에서 만난 멋진 소방관 청년 폴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그녀가 털어놓은 것. 캄수이는 맨디의 행복을 빌며 폴과 맨디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자청한다. 그러나 그의 지극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폴과 맨디의 관계는 진전되지 못한다. 이제 자신도 캄수이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된 맨디. 그녀는 자신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만을 남긴 채 섬을 떠나버린다.

영화 속에서 맨디는 캄수이에게 자신이 묵고 있는 다락방 어느 곳엔가 캄수이를 위한 선물을 몰래 감추어 놓았다고 말한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그것은 결국 마지막에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의 다른 이름은 어쩌면 '어긋남'이었을 것 같다.〈첨언밀어〉는 마치 시선의 엇갈림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인 양 철저히 그것에 초점을 맞춘다. 두 주인공 남녀는 분명 서로에게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서로에게 솔직하게 자신들의 감정을 털어놓지 못한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다른 인물들 역시 연심(戀心)을 표현하지 못한 채 미스 커뮤니케이션만을 거듭한다.

영화가 굳이 이런 식의 이야기를 택한 건 우리에게 특별한 감정, 다시 말해 안타까움의 느낌을 전달해주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선이 굵은 이야기를 갖고 있지 않은 이 영화는 그렇게 하려고 이런저런 아기자기한 디테일들을 차곡차곡 쌓는 방식을 이용한다. 세세한 디테일들이 쌓이고 쌓여서는 어느샌가 자연스레 이야기의 전모를 드러내는 그런 방식.

하지만 묘하게도 〈첨언밀어〉가 실패한 지점도 영화가 애초에 노리려 했던 그런 바로 동일한 지점이다. 영화는 안타까운 러브 스토리의 디테일들을 나열하지만 그것들을 적절히 쌓아놓지 못한다. 그렇기에 엇갈린 관계의 최종적 파국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안타까움을 느끼기보다는 그 갑작스런 결말에 적지 않은 당혹스러움을 느낄 뿐이다. 저 사람은 언제 저처럼 강렬한 집착을 키웠을까, 하는. 그런 의혹 위에서 (영화의 영어 제목이기도 한) ‘Sealed with a Kiss’ 와 같은 감미로운 주제곡은 큰 감흥을 주지 못하고 그저 흘러갈 뿐이다.

최근 들어 꽤 많은 홍콩의 멜로 영화들이 선보였지만, 사실 그것들 가운데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는 영화는 거의 없다. 요즘 엄청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홍콩 영화계에서 색다른 관객 유인책, 또는 돌파구로서 눈을 돌린 것이 멜로 영화들이었지만, 그것들은 대개 최근 홍콩 영화의 현주소만을 정직하게 반영했던 것이다.〈첨언밀어〉도 냉정히 이야기하자면 바로 그 위치에 선 영화이다. 이번에는 정말이지 안타깝게도. 1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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