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아 여론 女論

빚의 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나는, 마침내… 서푼 구문(口文: 소개비), 푼 오리 이자에 오천오백 원을 얻어 쓰기로 하고, 구월 그믐날밤, 나는 권리서를, 그는 지폐 뭉치를, 각기, 양복저고리 안주머니에 깊이 간수하고, 우리는 상왕십리정, 어느 조그만 대서소에서 만나 한 장의 ‘차용증서’를 작성하였던 것이다… 선변(先邊: 선이자) 떼고, 구문 주고, 인지대, 대서비용, 모두 제한 나머지, 오천이백 원도 옳게 남지 못한 돈을 품에 지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의 마음에 가득한 것은, 육 개월 뒤에 갚기로 되어 있는 오천오백 원의 본전보다도 오히려, 당장 내월부터 다달이 치러야만 할, 이자--팔십이 원 오십 전에 대한 걱정이었다.”(박태원, ‘채가(債家)’, 『문장』 1941.4)

 박태원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져 있는 ‘자화상 3부작’ 중 마지막 편 ‘채가’의 한 대목이다. 이 소설에서 ‘나’는 1930년대부터 한국에 불기 시작한 부동산 투기 바람에 큰 빚을 지게 된다. 주인공 ‘나’는 몇 해 동안 처가살이를 하면서 “유달리 제 소유의 집이 한 채 탐이 났었고” 친구의 권유도 있어서 돈암동 쪽에 집터를 사두었는데, 그것이 산 지 서너 달 만에 두 배의 가격으로 올랐다. 아내는 이쯤에서 땅을 팔아 이문을 남기자고 했지만, ‘나’는 집에 대한 소유욕과 투기욕 때문에 은행과 주변에서 빚까지 내어 그곳에 집을 짓는다.

 하지만 집을 짓는 과정에서 돈이 너무 많이 들었고, 자신의 수입으로는 이 집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집이 완공된 지 몇 달 만에 팔려고 내놓는다. 그러나 이즈음부터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기 시작하면서 집이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나’는 사채에까지 손을 대게 된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 세세히 나오듯 사채는 빌리는 순간부터 이자와 수수료를 떼이고 금리도 너무 높기 때문에, 대부분의 채무자들은 원금 상환은 고사하고 이자도 감당하기 어렵다.

 지난 14일 발표된 한국은행·통계청·금융감독원의 ‘2011년 가계금융조사’에 따르면 가계의 빚이 늘어나는 속도가 주택 보유자의 가처분소득보다 1.4배나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즉 대출을 받아 주택을 마련했지만 소득이 빚을 따라가지 못해 이자와 빚이 계속 늘면서 생계 유지 자체가 어려워지는 ‘하우스 푸어(House Poor)’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무주택자들의 고통은 그 이상이다. 전·월세 비용은 급등했고, 전셋집은 구하기조차 힘들고, 대출받기도 점점 어려워진다. 그래서 “우리에게 빚만 없드래두…우리들의 살림살이는, 얼마나 재미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자꾸만 되뇌던 소설 속 ‘아내’의 말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서민 모두의 마음이다.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