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배명복 칼럼

가랑비에 솜옷 젖듯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행주산성 위로 붉게 물든 낙조(落照)를 바라보며 퇴근하는 맛을 고인(故人)이 된 선배는 ‘일산삼락(一山三樂)’의 첫째로 쳤다. 서울 북쪽으로 밀려나 일산 신도시에 사는 사람들끼리 ‘위안(?)’ 삼아 하는 얘기다. 호수공원 산책도 선배가 꼽은 삼락의 하나였다. 또 하나가 뭐였는지 잊어버렸지만 지금 나보고 얘기하라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북한 땅을 감상할 수 있는 ‘특권’을 꼽고 싶다. 차를 몰고 20분 남짓만 달리면 북한 땅이 보이니 말이다.

 일전에도 자유로를 달려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올라갔다. 볼수록 장관이다. 한강이 이렇게 넓은가 싶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너머가 북한 땅이다. 화창한 날, 망원경으로 보면 개풍군 일대가 속살까지 보인다. 짓다 만 듯한 잿빛 가옥들과 황량한 들판, 생기 없는 주민들…. 전망대 지척에 있는 통일동산에는 인간의 욕망으로 굴러가는 자본주의의 소비와 향락문화를 상징하듯 음식점과 술집, 카페, 모텔이 즐비하다. 양안(兩岸)의 대비(對比)가 극명하다. 얼어붙은 두물머리처럼 남과 북을 가로막은 얼음 장벽이 너무 두껍다.

 지난주 류우익 통일부 장관을 만났다. 그는 “안타깝고 답답하다”고 했다. “북한 덕에 평생 먹을 욕 다 먹었다”고도 했다. ‘유연성’이 별명이 될 정도로 북한과 뭘 해보려고 나름 애를 썼지만 돌아온 것은 ‘철면피’‘얼간이’‘광신자’ 같은 욕설뿐이다. 또 “이명박 역적패당과는 영원히 상종하지 않겠다”는 거친 언사뿐이다. 류 장관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러기엔 남은 1년이 길고 아깝다. 넓고 긴 시각에서 인내를 갖고 남북관계를 풀어갈 수밖에 없다.

 지난 주말 국회의원 8명이 개성공단에 다녀왔다. 여야 국회의원들이 개성공단을 동반 방문한 것은 이 정부 들어 처음이다. 개성공단에는 123개 남측 중소기업들이 입주해 있다. 북한 근로자만 5만 명이 넘는다. 인구 25만 명인 개성에서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은 다 끌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로자들을 실어나르는 250대의 출퇴근 버스 때문에 아침·저녁에는 개성 시내에 교통 체증이 생길 정도다. 그런데도 입주 기업들은 인력이 모자란다고 아우성이다. 2만5000명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입주 기업 대표인 배해동 개성공단기업협회장(태성산업 대표)은 “3개월만 장사가 안 돼도 바로 대안을 생각하는 것이 사업하는 사람들”이라며 “아파트형 공장 하나를 빼고 개성공단에서 철수한 기업이 하나도 없다는 게 무슨 뜻이겠냐”고 반문했다. 화장품 용기를 만들어 수출하는 태성산업의 경우 830명의 북한 근로자를 2교대로 나눠 공장을 24시간 풀가동하고 있다. 근로자들 대부분이 잔업에 주말특근, 야근까지 하고 있다. 그러고도 그들에게 주는 평균임금은 수당까지 다 합해 월 115~120달러다. 말 잘 통하고, 손재주 좋고, 성실하기까지 한 이런 양질의 인력을 그 임금에 구한다는 것은 중국이나 베트남 그 어디에서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장 시설을 늘리고, 종업원을 더 뽑고 싶지만 천안함 사태 이후 시행 중인 5·24조치에 묶여 못하고 있다.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 때도 개성공단은 가동을 멈추지 않았다. 문을 닫기에는 남이나 북이나 서로 부담스럽다. 양측 모두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근로자 1명당 딸린 식구를 3명만 잡아도 개성공단에 목을 매고 있는 북한 주민이 20만 명이다. 그들은 남측 기업을 소중한 일터로 여기고 있고, 남측 기업들은 그들을 책임져야 할 직원으로 생각하고 있다.

 개성공단에 다녀온 남경필(새누리당) 의원은 “개성공단에 대해서만큼은 정경 분리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 함께 갔던 여야 의원들의 컨센서스였다”고 말한다. 5·24조치에서 예외로 인정하거나 탄력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정부에 개성공단 활성화 조치를 건의했다. 정부가 이를 일부 받아들여 어제 부분적인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설비 반출과 창고 개축을 허용하고, 체력단련장 등 주재원 편의시설을 지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규모 증설이나 신규투자는 여전히 불허할 방침이다. 이 정도로는 큰 의미가 없다. 개성공단에 대해서는 5·24 조치 적용을 배제한다는 정도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그래야 북한도 태도를 바꿀 수 있다.

 개성공단은 남과 북 서로에게 이익인 상생(相生)의 모델이다. 가랑비로 솜옷을 적시듯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다. 이미 북한은 개성공단의 달콤한 유혹에 길들여져 있다. 두물머리의 얼음이 녹으면서 남북 간의 얼음 장벽도 녹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