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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속 그 이야기 <23> 남한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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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음력 12월 14일. 인조가 청나라 군사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들어왔다. 인조는 47일을 성 안에서 버티다 이듬해 1월 30일 성을 걸어나와 항복했다. 양력으로 따지면 376년 전 이맘때다.

세월이 흘렀다. 굴욕의 역사는 희미해졌다. 남한산성은 이제 대표적인 서울 근교 나들이 장소가 됐다. 진입로를 따라 닭볶음탕 집이 줄 지어 서 있다.

이런 남한산성에 최근 또 한 번 변화가 일어났다.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몽촌토성부터 남한산성까지 이어지는 길을 ‘토성산성 어울길’로 이름 붙이고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했다.

문화재청은 남한산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준비하고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인조가 입성했던 남문부터 스스로 걸어나갔던 서문까지 남한산성을 걸었다. 조선의 왕이 항복하러 성을 나와 걸었던 376년 전 그날은 몹시 추웠다고 한다.

글=홍지연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남한산성 남문 앞에는 수령이 350년 정도로 추정되는 보호수가 있다. 기나긴 세월에 힘이 부쳤는지 남문 쪽으로 뻗은 굵은 가지를 쇠막대에 기대고 있었다. 산책로가 온통 눈에 덮였지만 남한산성을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 난공불락의 요새, 세계문화유산으로

“북쪽의 오랑캐가 쳐들어와 평양성, 북한산성,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마지막 남은 감수성….”

 KBS 개그콘서트의 인기코너 ‘감수성’이 시작할 때 나오는 고정 코멘트다. 엄연히 따지면 이 말은 틀렸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란 왔던 인조는 행궁에서 47일을 버티다가 이듬해 제 발로 걸어나갔다. 우리 역사에서 남한산성이 함락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난공불락의 요새 남한산성에는 병자호란의 굴욕이 씻기지 않는 오명처럼 따라다닌다.

 남한산성은 통일신라 때부터 한강 유역을 방어하는 군사 요충지였다. 남한산성의 최초 축성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와 있다. 신라 문무왕 12년(672년)에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다’는 부분이 있는데 이 ‘주장성’을 토대로 지금의 남한산성이 구축됐다. 2007년에는 지금의 행궁 자리에서 통일신라 군창지(군량미 창고) 터가 발굴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침략을 두 차례나 막아냈다.

 남한산성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각 시기의 다양한 축성기법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1000년을 훌쩍 넘긴 유적지인 남한산성 안에는 성곽·행궁을 포함해 모두 12개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2월 남한산성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올렸다. 잠정 목록 등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가는 전 단계다. 내년 1월께 정식 신청서를 내고 전문심사를 받게 된다. 최종 결정은 2014년 6월에 난다.

 요즘 행궁 보수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주말에 여섯 차례 일반인에게 시범 공개하고 있다. 정식 개방은 오는 5월로 예정돼 있다. 남한산성 문화관광 사업단 최동욱(35)씨는 “남한산성에 와서 등산이나 산책하는 것도 좋지만 남한산성에 깃든 역사와 문화재를 제대로 감상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해설사가 동행하는 행궁 투어를 추천했다.

1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러 나갈 때 통과했던 서문. 2 암문, 적에게 들키지 않고 성 안팎 출입을 하도록 고안된 비밀문이다. 지리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만들어졌다. 3 병자호란이 끝난 뒤 증축된 봉암성, 더 이상의 손상을 막기 위한 기본적인 조치만 취해져 본성과는 다른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 문화재 따라, 성곽 따라 걷는 길

방문객이 가장 많이 몰린다는 남한산성 탐방1코스는 행궁 앞 산성로터리에서 시작된다. 북문∼서문∼수어장대∼영춘정∼남문을 지나 다시 산성로터리로 돌아온다. 3.8㎞ 길이로 다 돌아보는 데 1시간20분쯤 걸렸다. 등산객 대부분은 널찍한 포장도로를 걸었지만, 성곽 바로 옆을 따라 걸으면 흙길을 밟을 수 있었다. 여울처럼 넘실거리는 북문 성곽 너머로 하남시가 보였다.

 북문은 서울에 있는 4대문과 비교하면 작았지만, 통행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서문은 달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성인 남자 셋이 나란히 서면 문이 꽉 막힐 정도였고 높이도 2m를 넘길까 말까 했다. 청 태종은 인조에게 이 작은 문을 통과해 삼전도까지 두 발로 걸어오라 명했다. 서문 밖에 있는 전망대에 서서 옛 삼전도, 지금의 석촌호수 쪽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인조가 걸었던 길을 눈으로 따라가 봤다. 거리가 꽤 멀었다.

 서문을 지나자 산성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수어장대가 나왔다. 장대는 장수가 군대를 지휘하던 장소를 말한다.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있었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서장대(수어장대)뿐이고, 나머지는 그 터만 있다. 수어장대를 지나 남문에 도달했다. 남한산성 주 출입구인 남문 밖으로 아기자기한 산책로가 이어졌다.

 탐방5코스는 남한산성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도는 코스로 남한산성 걷기의 정수가 되는 길이다. 5코스에서 단연 눈에 띄는 곳은 벌봉을 둘러싼 봉암성이었다. 벌봉은 해발 512m로 남한산성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청나라 군사가 이 벌봉에 올라 성 내부를 들여다보고 화포를 쐈다. 병자호란 때 벌봉 일대가 남한산성의 약점으로 드러나자 숙종은 1686년 봉암성과 한봉성을 쌓아 본성과 이으라고 지시했다.

 봉암성은 남한산성 북동쪽 능선의 꼭짓점이라 할 수 있는 동장대터 부근에서 시작됐다. 행궁과 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겠다는 기대를 안고 봉암성에 올랐지만 울창한 소나무 숲에 시야가 가려 여의치 않았다. 대신 과거를 볼 수 있었다. 바람에 깎이고 여기저기가 무너져 앉은 봉암성의 시간은 1686년에 멈춰 있는 듯했다. 본성과는 달리 아무런 보수공사를 하지 않았다.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자는 취지로 봉암성에는 더 이상의 손상을 막기 위한 기본적인 조치만 취해졌다.

 신기하게도 회칠 한 성곽을 비집고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자리를 잡은 나무는 뿌리를 뽑지 못하고 제초제를 뿌려 서서히 죽이는 수밖에는 없다고 한다. 난공불락의 요새도 시간과 자연의 힘은 이겨낼 수 없었다. 부서지고 으깨져 성한 곳이 없는 성곽은 세찬 바람에 흩날려 버릴 것만 같았다. 보수를 마치고 정갈한 모습으로 변신한 본성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군데군데 이가 빠진 성곽 너머 누런 햇무리가 보였다.

● 길 정보 남한산성을 둘러보는 길은 모두 5개 코스가 있다. 소개된 코스를 따라 정직하게 걷기보다는 지도를 보고 자신이 가고 싶은 문화재를 골라 남한산성을 걸어보길 권한다. 남한산성은 성곽에 둘러싸여 막힌 분지 지형으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남한산성 문화관광사업단 사무실에서 지도를 구할 수 있다. 문화관광사업단 홈페이지(www.ggnhss.or.kr)에서 예약을 하면 전문 해설사와 함께 남한산성 구석구석을 살펴볼 수 있다. 031-746-1088.

이번 달 ‘그 길 속 그 이야기’에서 소개한 ‘남한산성’ 영상을 중앙일보 홈페이지(www.joongang.co.kr)와 중앙일보 아이패드 전용 앱, 프로스펙스 홈페이지(www.prospecs.com)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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