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 버리고 부산 민심 잡기 … 저축은 피해자 보상법 강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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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열 정무위원장

‘부산 민심 잡기’에 급급한 국회가 9일 ‘법치’를 버렸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이날 저축은행 영업정지에 따른 예금자 피해를 소급 보상하는 내용의 특별법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다. ‘부실 저축은행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조치법’이다. 이 법안은 2008년 9월 이후 영업정지된 18개 저축은행의 5000만원 이상 예금과 불완전 판매된 후순위채권 보유자에게 피해액의 55%가량을 보전해 주도록 하고 있다. 현재는 저축은행이 문을 닫을 경우 5000만원 초과 예금자는 초과액의 30%가량을 돌려받고 후순위채권 보유자는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한다.

 이들 저축은행에 5000만원을 초과하는 돈을 맡긴 사람은 7만1754명, 예금액은 4754억원이다. 후순위채권은 1만637명이 3663억원어치를 갖고 있다. 재원은 저축은행의 분식회계로 과오납된 400억원 안팎의 법인세 환급금과 30억원가량의 감독분담금, 예금보험기금의 저축은행 특별계정 출연금을 끌어 쓰도록 했다. 추가 보상에 들어가는 돈은 10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법안은 당초 통과가 어려울 것으로 전망됐다. 원칙과 상식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와 금융권은 “피해가 발생한 다음 법을 만들어 구제하면 법체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고 우려해 왔다. 5000만원까지에 한해 금융회사에 맡긴 돈을 보호하는 예금보호제도가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저축은행 피해자 구제에 은행·보험 고객의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앞뒤가 안 맞는다. 이번에 재원으로 쓰기로 한 예보 특별계정 출연금은 저축은행이 아닌 은행과 보험사 고객이 낸 돈이다. 김석동 금융위원장도 정무위에 앞서 열린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예금자의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고 채권자 평등, 자기책임투자 원칙에도 벗어난다”며 부결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럼에도 총선을 눈앞에 둔 정무위 의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허태열(부산 북-강서을) 정무위원장은 이종혁(부산진을)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원안에 직접 수정안을 제시하며 법안 통과를 밀어붙였다. 저축은행 피해자가 많은 지역구 민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허 위원장은 자신의 지역구 출마를 선언한 문성근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으로부터 “저축은행 사태를 맡는 정무위원회 위원장이 한 게 뭐 있느냐”는 공격을 받고 있다. 허 위원장은 회의에서 “정부 측의 반대 의견은 수도 없이 들었다”며 “입법권을 가진 국회가 모든 사항을 종합해 법안 제정에 합의했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법안 처리 직후 블로그와 트위터에 “특별법이 오랜 산고 끝에 정무위를 통과했다. 절실한 환경에서 생계자금으로 고통받는 피해자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는 글도 남겼다. 민주통합당 의원도 ‘여야 합의’를 핑계 삼아 법안 통과에 찬성했다. 금융감독원 출신인 이성남 의원만이 표결에 불참하는 방식으로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조연행 금융소비자연맹 부회장은 “목소리가 작은 다수 국민과 일반 예금자에게 피해를 전가하는 악법”이라며 “선거를 앞둔 정치권 포퓰리즘의 극치”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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