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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⑭ 하이난(海南)성 하이커우(海口)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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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한국에 제주도가 있다면 중국에는 하이난다오(海南島)가 있다. 하이난은 중국의 남쪽 하늘 끝에 자리 잡은 휴양의 메카다. 하늘의 끝은 중국어로 톈야(天涯·천애)다. “하늘 끝에서 유랑하는 다 같은 신세니, 만나면 그만이지 옛 사람 아니면 어떠랴(同是天涯淪落人, 相逢何必曾相識).” 당(唐)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비파행(琵琶行)’에서 나왔다. 1988년 중국의 22번째 성(省)으로 승격한 중국의 톈야 하이난(海南)의 하이커우(海口) 일대로 떠나보자.

“허영 좇는 폭군” 명나라 황제에 직언한 해서의 고향

하늘과 땅이 끝나는 곳이라는 하이난다오(海南島)의 톈야하이자오(天涯海角)에서 신혼 부부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남녀 커플이 이곳에 함께 다녀오면 평생을 함께 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중앙포토]

“황상께서는 한(漢)나라 문제(文帝)보다 영명하시지만 인덕과 업적은 한 문제에 훨씬 미치지 못하옵니다. 한 문제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문경(文景)의 치(治)’를 이루었지만 지금 황상 치하의 나라는 ‘관리들은 탐욕에 빠져 있고, 백성들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없으며, 수해와 가뭄이 수시로 일어나 도적 떼가 들끓고 있는’ 형국이옵니다. 이는 전적으로 황상께옵서 의심이 많고, 신하들을 가혹하게 대하시며, 사욕과 허영을 좇는 혼군이자 폭군이기 때문입니다.”

 청백리의 대명사 명(明)나라 해서(海瑞·1515~1587)가 작정하고 황제에게 일갈한 ‘치안소(治安疏)’의 일부다. 미리 관을 짜두고 쓴 글답게 거침이 없었다. 그는 반평생을 관직에 있으면서 무수히 파면을 당했고 스스로도 사직을 청했다. 1966년 나온 ‘해서를 파직하다’라는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은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이었다. 해서는 청렴했다. 최종 관직이 오늘날의 감사원장 격이었지만 장례비가 없어 동료들이 돈을 걷어 장례를 치러줄 정도였다. 해서가 죽자 상인들은 점포를 닫아 걸고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행렬이 무려 백여 리를 넘었다고 『명사(明史)』 ‘해서열전’은 기록했다.

 해서의 고향이 바로 하이난다오의 경산(瓊山·지금의 하이커우)이다. 오늘날 하이난성의 약칭인 충()은 이곳 경(瓊)의 간체자다. 중국의 변방 하이난 중에서도 경산은 무척 가난했다. 역대 황제들은 하이난을 죄인들의 유배지로 애용했다. 하이커우시 남쪽에 자리 잡은 오공사(五公祠)는 당·송(宋)대에 하이난으로 유배 온 다섯 충신을 기린 사당이다. 오공은 당나라의 재상 이덕유(李德裕)와 송나라의 이강(李綱)·조정(趙鼎)·이광(李光)·호전(胡銓) 등 5명의 충신을 가리킨다.

 하이커우시 빈야(濱涯)에는 해서묘원(海瑞墓園)이 조성돼 있다. 고향으로 향하던 해서의 영구가 빈야촌을 지나던 중 관을 묶은 줄이 갑자기 끊어져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묘를 썼다. 그의 고향과 묘역이 다른 이유다. 묘원에는 만력제(萬曆帝)가 직접 쓴 ‘월동정기(東正氣)’란 현판이 지금도 관광객을 맞고 있다. 해서의 묘에는 그가 생전에 동경했던 선배 관리 고가구(顧可久·1485~1561)에게 헌사한 시 가운데 “세 번 태어나도 얼음 서리 같은 지조를 바꾸지 아니했으니, 만 번 죽어도 몸은 항시 사직에 머물렀다(三生不改霜操, 萬死常留社稷身)”는 구절이 지금도 적혀 있다.

“기이한 절경 으뜸” 소동파, 하이난 떠나며 시 읊어

하이난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한 중국의 대문호 소동파의 초상.

“가지 위의 버들 솜은 바람에 날려 더욱 적어지는데, 하늘가 어느 곳인들 향기 나는 꽃이 없으리오(枝上柳綿吹又少, 天涯何處無芳草).” 하이난의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한 송대 최고의 문장가 소동파(蘇東坡·1037~1101)의 시 ‘접련화(蝶戀花)’의 일부다.

 소동파는 예순 살(1097년)부터 3년간 하이난다오 단저우(州)로 유배당했다. 당시 송나라 조정에서는 왕안석(王安石)이 우두머리인 신법당(新法黨)과 구양수(歐陽脩), 사마광(司馬光) 등의 구법당(舊法黨) 사이에 다툼이 치열했다. 구법당에 속했던 소동파는 신법당의 득세로 광둥 후이저우(惠州)에서 3년, 하이난다오에서 3년간 유배당했다. 그는 급진개혁파에 맞선 보수세력의 일원이었다. 철종(哲宗)이 죽고 즉위한 휘종(徽宗)은 신구 양대 파벌을 고루 등용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조치로 유배에서 풀려난 소동파는 조정으로 되돌아 가던 도중 병사했다.

 “이곳(하이난)은 음식에는 고기가 없고 병에 걸려도 약이 없으며, 거처함에 방이 없고 밖에 나가도 벗이 없으며, 겨울에는 석탄이 없고 여름에는 찬 샘물이 없습니다”며 소동파는 하이난의 척박한 환경을 한탄했다. 또 “만리 먼 하이난다오가 진정 나의 고향(海南萬里眞吾鄕)”이라며 하이난의 풍경과 정취에 빠져 제2의 고향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늘에 드리운 암무지개는 구름 끝에 걸리어 땅에 닿고, 상쾌한 수바람은 바다에서 불어온다.” 하이난 무지개와 바람의 풍광을 남녀의 애틋한 정으로 묘사한 시인의 정취는 지금도 하이커우의 오공사 동측 소공사(蘇公祠)에 남아 있다.

 “남쪽 황무지에서 구사일생한 귀양살이 내 원망치 않으리니, 이번 유람은 기이한 절경이 평생에 으뜸이어라(九死南荒吾不恨, 玆遊奇絶冠平生).” 유배를 마치며 지은 ‘6월20일 밤 바다를 건너며’란 시에서 시인은 다시 못 볼 하이난의 절경을 못내 아쉬워했다.

 하이난의 걸출한 인물로 쑹(宋)씨 세 자매도 빼놓을 수 없다. 20세기 초 중국을 쥐락펴락했던 쑹가 황조의 세 자매, 돈을 사랑해 은행가 쿵샹시(孔祥熙)와 결혼한 쑹아이링(宋齡·1890~1973), 나라를 사랑한 쑨원(孫文)의 부인 쑹칭링(宋慶齡·1892~1981), 권력을 사랑해 장제스(蔣介石)와 결혼한 쑹메이링(宋美齡·1897~2003)의 아버지 쑹야오루(宋耀如)의 고향이 하이커우 바로 남쪽 원창(文昌)이다.

싼야(三亞) 절벽엔 ‘사슴아가씨의 사랑’ 전설이

해서(海瑞)의 묘 입구. 명(明) 만력제(萬曆帝)가 쓴 ‘월동정기(?東正氣, 광둥성의 바른 기운)’란 네 글자가 새겨져있다.

하이난다오에 전해오는 전설 하나. 옛날 옛적 하이난의 왕이 사슴을 신봉하는 리(黎)족의 명궁 아흑(阿黑)을 찾았다. 그에게 불로의 명약인 녹용을 구해오라고 명령했다. 아흑이 거부하자 그의 모친을 인질로 잡아 협박했다. 아흑은 어쩔 수 없이 하이난의 최고봉 오지산(五指山)에 들어가 가장 아름다운 사슴을 찾아내 삼일 밤낮으로 뒤를 쫓았다. 싼야만의 절벽 끝까지 몰린 사슴은 고개를 돌려 아흑을 쳐다봤다. 눈가에 눈물을 흘리던 사슴은 어느새 아리따운 아가씨로 변해 있었다. 그 모습에 반한 아흑은 활을 버리고 사슴신의 도움을 받아 몹쓸 왕을 무찔렀다. 어머니도 구한 아흑은 사슴아가씨와 평생 행복하게 살았다는 싼야의 전설이다. 당시 사슴이 고개를 돌렸다는 절벽에는 녹회두(鹿回頭) 공원이 조성됐다. 현재 12m 높이의 거대한 사슴 석상이 싼야만을 차마 내려다보지 못한 채 고개를 돌리고 있다. 사슴의 전설이 깃든 싼야는 지금도 사슴의 성(鹿城)이라 불린다.

 하이난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쌴야시에서 서쪽으로 24㎞ 떨어진 톈야하이자오(天涯海角)다. 남녀 커플이 이곳에 함께 다녀오면 평생을 함께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곳 앞바다에는 ‘해[日]’와 ‘달[月]’이란 글자가 적힌 두 바위가 마주 기대어 서 있다. 일월석(日月石)이다. 해변가에는 ‘톈야(天涯)’와 ‘하이자오(海角)’라고 적힌 암벽과 남천일주(南天一柱)가 쓰인 돌기둥이 서 있다. 최근 중국이 ‘핵심 이익’이라고 천명하면서 긴장이 고조되는 남중국해가 톈야하이자오의 남쪽으로 펼쳐진다. 하이난성의 육지 면적은 3만4300㎢. 대만에 이은 중국 제2 의 섬이지만, 관할하는 해역은 200만㎢로 섬 면적의 58배가 넘는다. 중국 전 국토 면적의 약 5분의 1에 해당한다. 남중국해 수호를 위해 싼야 근처에 항공모함 기지를 건설 중이란 정보가 흘러나온다. 핵잠수함 기지는 이미 운용 중이다.

‘부동산 광풍’ … 아파트 매매가 베이징·상하이 제쳐

하이커우에서 동남쪽으로 105㎞가량 떨어진 해안가에 보아오(博鰲)라는 작은 어촌이 있다. 2002년 4월 이곳에서 아시아 26개국이 주축이 된 ‘제1회 보아오 아시아 포럼’이 열렸다.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의 아시아 버전을 중국이 창설한 것이다. 시작 당시만 해도 보아오 포럼이 세계가 주목하는 행사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한 이는 드물었다. 당시 세계 경제의 주도권은 서구의 손아귀에 있었으며 중국은 빠르게 성장하는 덩치 큰 개발도상국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년, 세계의 질서가 급변했다. 지난해 10회를 맞은 보아오 포럼의 주제는 ‘포용성 발전’이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비롯한 세계 40여 개국의 지도자와 고위 관료, 기업인, 학자 등 14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석 달 전인 1월에 열린 다보스 포럼보다 열기가 뜨거웠다. 세계 언론의 주목도 다보스 포럼을 능가했다. 굴기(起·우뚝 일어섬)하는 중국의 국력에 힘입어 보아오는 다보스를 제치고 새로운 국제질서 논의의 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하이난은 몇 해 전 부동산 광풍으로 몸살을 앓았다. 국무원이 나서 하이난을 국제관광의 요충으로 키우기 위해 외국인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고 내국인 면세 쇼핑을 허용하면서 부동산 개발상들이 하이난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광풍이 휩쓸던 2010년 초 하이난 싼야의 경우 ㎡당 아파트 매매가가 최고 12만8000위안(현 환율로 약 2300만원)에 육박했다. 베이징, 상하이를 제치고 전 중국에서 부동산 거품 1위의 ‘영예’를 차지했다. 최근 발표에 따르면 2011년 한 해 동안 하이난성에서 판매된 주택 총량은 840만9200㎡, 판매액은 759억2700만 위안(약 13조6144억원)에 달했다. 전년 대비 각각 0.8%, 3.4% 증가한 수치다. 시장의 폭등세는 멈췄지만 여전히 강세다. 그 바탕은 관광산업이다. 지난해 하이난성에서 하룻밤 묵은 여행객은 3000만 명을 돌파했다. 같은 기간 제주도가 860만 명 이었던 것에 비해 3.5배의 수치이자, 한국을 찾은 외래 관광객 979만4796명의 세 배에 육박한다. 제주도를 벤치마킹했던 하이난다오의 성장세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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