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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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흔히들 일본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라고 그러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라퓨타〉, 〈원령공주〉의 같이 한폭의 그림같은 수려한 작품이나 〈공각기동대〉나 국내 최초의 정식 일본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는 1호 극장개봉작이 된 〈무사 쥬베이(원제:수병위인풍첩)〉처럼 현란한 그래픽이나 액션씬으로 무장된 작품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이렇게 국내 매니아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작품들의 상당수는 가족취향의 지브리작품을 제외하고는 흥행성적이 그리 좋지 못한 편이다.

국내 재패니메이션 매니아들 사이에서 공개시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인랑〉이나 〈뱀파이어 헌터D 2〉같은 작품도 일본 현지내에서만 보았을 때는 그리 대단한 흥행성적은 누리지 못할 것이다. 보는 층이 한정이 되어있는 매니아(특히 성년)취향이다 보니 작품의 대중적인 인기도는 그리 크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작품들은 무엇으로 투자비를 건지는가? 일본의 경우에는 소프트와 캐릭터판매시장이 제작환경을 뒷받침해주고 있는데,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 영상소프트의 값이 꽤 높은 편으로 30분짜리 OAV애니메이션이 5 ∼ 8만원정도하고 극장용애니메이션인 경우 특별한정판은 14 ∼ 20만원, 일반판은 9 ∼ 12만원정도의 살인적인 가격에 팔리고 있다.(미국의 경우 타이틀 1장에 2 ∼ 3만원, 국내의 경우에도 1만원에서 3만원정도면 신품신작비디오를 살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고가(高價)라 하더라도 자신이 보고싶은 작품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서 보는 시장습관 덕분에 소프트 판매수익만으로도 꽤 많은 수익을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제작사의 경우 작품이 기존의 기획과 예산, 스케줄에 맞게만 만들어지는지만 신경쓰면 되는 것이고, 그 이후 그 작품이 벌어들이는 돈에 대해서는 배급사와 판매사의 몫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국내로 눈을 돌려서 국내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경우를 살펴보자면, 국내애니메이션 소프트시장은 블랙마켓을 제외한다면 거의 대부분이 렌탈시장이다. 즉 디즈니나 아이들교육용 애니메이션을 제외하고는 국내에서 개인이 애니메이션 비디오를 사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기 때문에 제작초기에 찍어내서 비디오대여점에 팔리는 수량이 전부라는 이야기이다.

캐릭터상품이야 심하면 극장공개후 3개월에서 1년후에나 제품이 나오는 경우도 있으니(보통은 그 기간 전쯤에 나와야 정상이다) 거의 경미한 수익밖에 기대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렇다보니 기대할 수 있는 수익이라면 관객입장료 수익과 해외배급수익인데, 뭐 해외쪽이야 사정이 뻔하니 이야기에서 제외한다 해도, 한국 특히 흥행성적의 1순위인 서울지역에서 국산애니메이션이 시내중심가 극장에 걸리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며 극장수조차도 10개 내외(무슨 무슨 회관까지 포함해서..)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보니 왠만큼 입소문이 나지 않고는 언제 걸렸냐 싶게 간판을 내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것이다.

물론 국산애니메이션 자체를 홀대하는 극장배급망에도 문제는 없지 않지만, 솔직히 최근 제작된 국산 극장용애니메이션의 질을 본다면 아주 이해 못할 일도 아닌 것이 도무지 주관객층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구성이나 대사에, 매니아취향을 어렴풋이 신경쓴 듯한 난해한 스토리나 설정이 들어가 있는가하면(한국적이고 신비적인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기획단계부터 상당한 돈이나 시간은 많이 들어갔다고 광고를 하는데 정작 보고 있으면 날림인 듯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특히 음향효과나 대사더빙과 같은 후반작업) 누가 봐도 디즈니나 재패니메이션 매니아취향의 일본 극장용 애니메이션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작품에다 대고 일반관객들한테 애국심으로 보아달라는 이야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현 싯점에서 국내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정말 투자한 만큼의 어느 정도의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차라리 다음과 같은 점에 신경을 쓰는 편이 낳을 것 같다.

첫째, 제일 먼저 잊지 말하야 할 점은 주타겟은 어린이라는 점이다. 애니메이션 매니아라는 말을 워낙 자주 듣다보니 마치 애니메이션은 주로 매니아들이 보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쉬운데 진정한 관객층은 초등학교 저학년을 중심으로 한 어린이들이다. 국내 애니메이션 매니아 인구가 몇만에서 몇십만에 이른다고들 자주 말을 하지만 과연 그 중에서 국산애니메이션 상영작을 극장에 가서 보는 인구는 얼마나 될까?
분석·비판하길 좋아하고 집단적 의식이 강한 국내 매니아층의 속성상 그리 칭찬을 듣기 힘든 국산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경우 실제로 극장에까지 가서 보는 경우는 그리 많지가 않다. 매니아층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차라리 부모님을 대동하고 오는 어린이층이 훨씬 관객동원에는 훨씬 이득이다.

둘째, 만화나 애니메이션으로 이미 알려진 작품을 제작해라.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오리지날 원작과 시나리오를 좋아하는 편이데, 솔직히 어느 정도 제작노하우가 뒷받침이 된다 하여도 오리지날의 기존작품에 비하여 흥행에 대한 리스크가 훨씬 큰 편이다.
이웃 일본에서 연간 자국제작영화 흥행순위 상위에 들어가는 작품을 살펴보면 〈공각기동대〉나 〈메모리즈〉같은 것들이 아니라 수년간 혹은 수십년간 어린이에게 친숙해진 〈드래곤 볼〉이나 〈도라에몽(국내소개명:동짜몽)〉같은 작품들이다. 2시간 이내에 처음 보는 이야기에 대해 어린이들이 그 작품의 주제나 인물성격을 감정이입시킨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셋째, 보여줄 거리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재미이다. 자주 미국이나 일본작품들을 예로 들다보니 요즘 들어 화려한 비쥬얼씬을 넣기를 좋아하는데, 물론 어린이들의 경우 화려한 그래픽에 쉽게 빠져들긴 하지만 솔직히 어린아이들의 집중력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한다. 현란하기만 한 3D그래픽을 1시간 30분 정도 계속 보여준다고 생각을 해보자 과연 끝까지 몰입해서 볼 수 있는 어린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긴 시간 동안 하나의 이야기에 몰입해서 볼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재미'이다. '재미있다', '재미없다'의 기준은 상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린이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이야기와 템포가 생명이다. 영화의 재미를 최대한 알려주는 최전선은 '예고편'이다. 예고편의 재미를 배가시켜주는 것은 편집에서 오는 속도감과 긴장감인 것이다. 실제로 간단한 이야기구조라도 배치와 레이아웃, 편집만 잘하면 충분히 재미있어 질 수 있다.

전국 기차역 도서매점이라는 곳은 위치나 크기의 특성상 많은 책을 비치해놓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하면서도 재미있게 읽히고 있는 신작 위주로 비치하는 장소이다. 거기서 파는 만화책 중 종류는 거의 2∼3가지가 전부인데, 그중 2가지는 〈못말리는 짱구(크레용 신짱)〉와 〈포켓몬스터〉이다. 물론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꽤 좋은 흥행성적을 거둔 두 작품에서는 현란한 그래픽도 복잡한 시나리오나 설정도 없다. 단지 보는 이로 하여금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재미가 있을 뿐이다. 그 작품을 보고 나서 무엇을 느끼거나 배우는 점이 무엇이든 간에 먼저 봐야지 그 뜻도 전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얼마전 한 단편영화작가가 자신이 만든 단편영화를 편집해 극장에 걸었다가 엄청난 흥행성적을 거둔 적이 있었다.(가격대 흥행성적대비로는 국내상영작중 1위가 분명하다) 입소문이 흥행의 큰 변수로 되어있는 영화시장 속성상 관객의 마음을 끌지 못하는 영화는 살아날 수 없는 법이다. 관객의 마음에 들 수 있는 적절한 구애방법을 좀더 정확하게 구사하려는 마음이 지금 한국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에 필요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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