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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현 기자의 문학사이 ② 박완서 마지막 소설집 『기나긴 하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박완서

박완서(1931~2011) 선생의 마지막 소설집을 경쾌하게 읽었다. 1주기(22일) 즈음 출간된 『기나긴 하루』(문학동네) 말이다. 선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세 편의 신작 단편과 평론가 김윤식, 소설가 신경숙·김애란이 추천한 세 편의 대표작은 문장의 경쾌한 리듬이나 이야기의 탄탄함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1주기 앞뒤로 선생의 등단작 『나목』 특별판(열화당)과 『박완서 소설 전집』(세계사)도 나왔다. 이 책들 위로 『기나긴 하루』를 포개면, 한국 문학의 거대한 탑이 형성된다. 박완서라는 이름의 이 탑을 ‘상처의 문학’이라 부르려 한다. 전쟁통에 오빠를 잃고, 훗날 남편과 막내 외아들마저 잃은 치명적인 상처로부터 박완서 문학이 솟아났다.

 선생의 마지막 소설집에서 우리는 인간의 상처가 미학적 구조물에 다다른 한 사례를 목격한다. 머리에 올린 자전소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2010)의 한 대목. “온갖 수모를 겪을 때 그걸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언젠가는 저자들을 악인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다.”

 선생은 이 복수 의지 때문에 소설을 시작했다. 하지만 복수심으로만 들끓었다면, 박완서라는 탑은 진즉 무너졌을 테다. 선생은 자신의 상처를 문학적으로 조각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또 다른 신작 ‘빨갱이 바이러스’(2009)에서 그 매끈한 조각의 흔적과 마주친다. 노년의 주인공은 우연히 만난 세 명의 여인들로부터 상처에 대한 고백을 듣는다. 독백을 교차하며 이야기를 끌고 가는 미학적 성취도 뛰어나거니와, 끝내 제 상처를 감추고야 마는 주인공은 매혹적이다. 어떤 상처는 너무 아파서 도무지 소통이 불가능한 것이다. 전쟁에 얽힌 아픈 가족사를 지닌 노년의 ‘나’는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상처하고 만나도 하나가 될 수 없는 상처를 가진 내 몸이 나는 대책 없이 불쌍하다.”

 선생의 문학적 전략은 이런 것이다. 상처를 감추면서 드러내기. 이를테면 “아프다”고 말하는 대신,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이다. “어떤 상처하고 만나도 하나가 될 수 없는 상처”였으므로, 선생은 고통의 서사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증언했던 것이리라. 그러니 이런 울분은 오롯이 선생의 목소리다. “아무렇지도 않지 않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면 그게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였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으시죠.”(‘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박완서 선생은 생전 맨발을 보인 적이 없었다. 발에서 다리로 퍼져 나간 붉은 반점 때문이다. 큰딸조차 선생의 말년에서야 이 반점을 목격했다고 한다. 상처를 감추고 싶은 여린 마음. 그러면서도 이 상처를 누가 좀 알아줬으면 하는 인간적인 욕망. 그 여리고 풋풋한 인간의 면모가 박완서 문학의 기둥이다.

 우리는 1년 전 그 기둥을 잃었다. 그가 아팠으므로 우리가 살았다. 우리는 박완서라는 상처에 빚진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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