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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을 찾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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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권석천
사회부문 부장

“나 한 사람 희생되더라도, 끝까지 사법개혁을….” 그는 이를 악물었다.

 2007년 가을, 서울 성동구치소. 수의(囚衣)에 ‘13XX’ 번호를 단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와 마주 앉았다. 그의 반성하지 않는 확신에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재판에서 진 게 아무리 분하고 억울하더라도 부장판사에게 석궁을 겨눈 건 사실 아닌가. 그런 사람이 어떻게…. 지난주 영화 ‘부러진 화살’을 볼 때도 당시의 불편한 느낌은 이어졌다. 김 전 교수 얼굴이 교수 역을 맡은 배우 안성기의 얼굴에 자꾸 오버랩됐다.

 그러다 자세를 고쳐 앉은 건 교수가 구치소에서 변호사와 첫 면담을 하는 장면에서였다. 교수는 변호사와 ‘법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언쟁을 벌이다 이렇게 말한다. “법은 아름다운 겁니다. 법은 수학하고 똑같아요. 문제가 정확하면 답도 정확하죠.”

 수학자 김명호가 왜 극단적 행동에 나서게 됐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사였다. 그는 ‘수학처럼 정확한’ 법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숱한 재판을 지켜본 기자로선 교수의 생각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유감스럽게도 법은 수학이 아니다. 수학은 숫자와 공식으로 증명되고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는 세계다. 인간의 욕망과 구질구질한 현실을 다루는 법은 그렇게 명징한 결론을 내지 못한다. 다수설부터 소수설까지 답도 여러 갈래다. 재판에는 한계가 더 많다. 내 말이 분명히 맞는데도 뒷받침할 증거가 부족하다면 백이면 백, 지는 게임이다.

 비극은 김 전 교수가 독학으로 익힌 법조문에 모든 것을 건 데서 시작됐다. 그는 ‘나홀로 소송’에서 패소한 뒤 좌절에 빠졌다. 그의 눈엔 “판사들이 돈과 로비를 받고 진실에 등을 돌린 것”으로 비쳤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다. 이후의 행동은 교수 자신이 아름답다고 했던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이다. 부장판사의 집 부근을 일곱 차례나 답사한 뒤 석궁을 들고 나타났다. 그의 가방 안엔 회칼이 있었다. 현실 속의 석궁 교수를 미화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렇듯 영화의 리얼리티에 문제가 있지만 법원의 재판 과정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영화를 따라가면서 재판 절차가 계속 눈에 밟혔다. 교수 측은 “증거 조작 가능성이 있으니 속옷과 겉옷에 묻은 혈흔이 부장판사의 피가 맞는지 검증해 달라”고 계속 요구한다. 재판부는 이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속옷과 겉옷에 있는 혈흔 두 개가 동일한 남성의 것으로 나타났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었다. “혈흔이 부장판사의 피라는 사실을 꼭 검증해 봐야 아느냐”라는 얘기다.

 만약 검증 신청을 받아줬다면 어땠을까. 결론은 같더라도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법원의 입지가 넓어졌을 것이다. 한 판사는 “피해자에게 피까지 뽑아 달라고 하기가 꺼려졌던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어쩌면 ‘어떻게 부장판사의 피를…’이라는 엘리트주의의 발로는 아니었을까. ‘부러진 화살’도 마찬가지다. 부장판사의 몸에 박혔다는 그 화살이 사라졌다면 경위를 면밀하게 확인했어야 했다. 재판부로선 부러진 화살 없이도 유죄를 내리기에 충분한 증거와 정황이 확보됐다고 판단했을 터. 하지만 논란이 불붙기 쉬운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보다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했다.

 ‘부러진 화살’은 사법의 험난한 앞날을 예고하고 있다. 이제 법은 판·검사, 변호사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나 인터넷만 검색하면 법조문은 물론 판례까지 줄줄이 뜬다. 국민이 판사들에게 바라는 건 법률 지식이 아니다. 공정성이다. 법과 상식의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이다. 아마추어의 문제 제기에도 귀를 기울이는 자세다. 판사들이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절차적 정당성만큼은 철저하게 확보해야 한다. 당사자가 납득하지 못할 경우 부러진 화살의 행방까지 찾아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법원은 영화가 사실과 얼마나 다른지 따지는 데 많은 힘을 쏟지 말기를 바란다. 상영관을 찾는 발길이 많다는 것은 재판에 대한 불신이 저변에 깔려 있다는 뜻이다. 관객들은 자신들이 느꼈던 점을 확인하기 위해 스크린 앞에 앉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