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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 개봉전 판사에 배포한 대법원 자료 보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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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힘이 스크린을 넘어 현실을 뒤흔드는 현상이 재연될까. 지난해 467만 관객을 끌어들이며 가해자 처벌과 관련법 개정 등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영화 ‘도가니’에 이어 정지영 감독의 영화 ‘부러진 화살’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 영화는 개봉한 지 사흘 만에 관객 15만 명을 모으며 박스오피스 3위에 올랐다. 30대 남성 관객들의 예매율이 높아 설 연휴를 거치며 바람몰이를 할 것으로 보인다. 손익분기점은 전국 관객 50만 명이다.

‘부러진 화살’은 2007년 일어난 ‘판사 석궁테러’ 사건이 소재다. 당시 판결에 불만을 품고 부장판사 집에 석궁을 들고 찾아가 상해를 입힌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와 박훈 변호사가 주인공이다. 김 전 교수는 2008년 6월 대법원에서 징역 4년형이 확정돼 형기를 다 복역하고 지난해 초 출소했다.

‘부러진 화살’은 이들을 통해 사법부의 권위적이고 비합리적인 행태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대법원은 개봉을 앞두고 각급 법원 공보판사에게 A4용지 2장 분량의 자료를 배포했다. 대법원은 이 자료에서 당시 부러진 석궁 화살이 증거물로 제출되지 않은 이유, 화살이 옷을 관통했는지 여부 등에 대해 영화 내용과 대법원 판결을 통해 확인된 사건 경위와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영화를 보면서 궁금증을 가질 만한 내용을 중심으로, 사실과 다른 점을 정확히 알린다는 취지”라고 말했다.

사법부 최고기관이 종결된 사건에 대해, 그리고 특정 영화에 대해 개봉 전부터 언론에 해명자료를 낸 건 이례적이다. ‘부러진 화살’ 개봉 전부터 트위터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법부 비난 여론을 강하게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영화가 갖는 ‘현실개입의 힘’이다. ‘도가니’가 그걸 입증했다. 관객의 분노는 자연스럽게 장애학생 성폭행 가해자들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사법부로 향했다. 2009년엔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이 있었다. 1997년 발생한 ‘이태원 햄버거가게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흥행은 안 됐지만, 수사기관에 대한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다.

이 사건의 미국인 유력 용의자는 검찰이 허둥대는 사이 미국으로 도주했다. 영화를 본 시민들의 빗발치는 범인송환 요구에 법무부는 뒤늦게 미국에 범죄인 인도를 청구했다. 피살자 어머니는 지난해 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판검사는 있으나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검찰과 사법부의 미온적인 대응을 비판했다.

대법원이 ‘부러진 화살’에 대해 조기진화에 나선 건 이처럼 영화 관람 후 사법부가 맞을지 모르는 ‘후폭풍’을 염두에 둔 때문으로 풀이된다. 영화에서 김 전 교수와 변호사는 화살에 부장판사가 맞았는지를 두고 ‘합리적 의심(resonable doubt)’을 제기한다. 왜 피해자의 조끼와 속옷엔 핏자국이 있는데 와이셔츠엔 없는지, 부장판사가 맞았다는 부러진 화살은 어디 갔는지 등이다. 재판부는 이들의 의혹제기에 속시원한 해답을 주지 못한다. 이에 대해 김 전 교수는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라며 재판부를 기피하겠다고 나선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자 비난 여론이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일기 시작했다. “판결을 감정적으로 해서 경미한 사안을 침소봉대했다”는 식이다. 심지어 “진실을 알려면 극장에 가야 하는 세상”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끊이지 않는 법조 비리 등을 통해 사법부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어졌음을 드러내는 반응이다.

영화가 사회구성원의 공분을 일으켜 현실을 바꾸는 현상은 긍정적일 수 있다. ‘도가니’는 국회의원이나 시민단체, 사법부와 경찰이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부산물이 따를 수 있다. 대표적인 게 ‘사실을 다룬 픽션=사실’로 받아들이는 반응이다. 복잡한 사실관계를 2시간 안팎으로 압축하다보면 생략과 비약이 이뤄지는 건 필연적이다.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더라도 관객은 그걸 사실이라고 믿게 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명지대 김영진(영화뮤지컬학부) 교수는 “실화에 기초했다고 해도 영화는 결국 각색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실체적 진실을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기선민·김현예 기자 murph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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