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 무더기 신용등급 강등에 신평사 규제안 역풍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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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호 20면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16일(현지시간) 프랑스에서 열린 유럽의회 연설에서 “투자자와 금융감독 당국이 국제신용평가회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고 촉구했다.[스트라스부르 로이터=연합뉴스]

S&P는 13일 유로존 9개국에 이어 16일 EU의 ‘실탄창고’로 불리는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의 신용등급마저 강등했다. 피치도 이달 말까지 이탈리아의 신용등급을 두 계단 내릴 가능성을 내비쳤다. 피치의 알레산드로 세테파니는 18일 한 콘퍼런스에서 “이탈리아의 등급 강등은 가능한 선택 중 하나”라고 시인했다. 미국 무디스는 16일 프랑스의 신용등급을 ‘AAA’로 유지했지만 1분기 내 EU 회원국의 신용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빅3’ 국제신용평가회사 시험대에

빅3 신평사의 파상공세에 뿔이 난 EU 지도자들은 평가의 신뢰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격앙된 발언을 쏟아냈다. 아마데우 알타파지 EU 대변인은 17일 정례브리핑에서 “S&P의 유로존 등급 강등은 시장과 동떨어진 결정이며, EFSF 등급 강등도 시장 상황을 충분히 살피지 않은 기계적인 조치”라고 폄하했다.

EU는 국제 신용평가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한 빅3 신평사의 근본적 신뢰성 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16일 유럽의회 연설에서 “투자자와 금융감독 당국은 신평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라”고 주장했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도 이날 도이칠란트풍크 라디오와 인터뷰에서 “우리는 신평사들의 영향력을 줄이는 데 공감한다. 은행·보험 감독 분야에서 신평사의 역할을 어떻게 줄여나갈지 고민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교수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 기고에서 “신평사가 무소불위 권한을 발휘하는 건 신평사에 과도하게 의존해 금융 규제를 해 온 EU의 자업자득”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EU는 신평사 관련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에 따르면 ▶신용등급 평가의존도 축소 ▶신용평가 경쟁 강화 ▶등급평가 투명성 강화 등이다. 금융회사가 무작정 신평사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평가방법을 통해 유가증권 신용도를 평가하도록 유도하는 내용이다. 또 은행·기업 등 채권 발행자가 신평사를 3년마다 교체해야 한다. 신평사를 두 개 이상 지정할 경우 하나는 유럽에 등록한 업체로 한다. 신평사의 잘못으로 투자자가 손해를 보면 EU 회원국 어디에서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특히 등급 평가에 잘못이 없음을 신평사가 입증해야 한다. 또 아주 예외적인 상황이면 일시적으로 국채의 등급평가를 금지하는 ‘일시 정지(블랙아웃) 규정’도 구상되고 있다. 블랙아웃 대상은 EU·ECB·국제통화기금(IMF) 등이다.

금융시장의 반응도 빅3 신평사 쪽에 냉담한 반면, 유로존에 힘을 보태는 분위기다. 그래서 그런지 등급강등 철퇴를 맞은 유로존의 국채금리는 오히려 하향 안정됐다. 사상 처음 최고등급 ‘트리플A(AAA)’ 지위에서 밀려난 프랑스는 16일 이전보다 더 낮은 이자에 86억 유로(약 12조6500억원)어치의 국채를 발행했다. 1년짜리 국채 발행금리가 9일에는 0.454%였으나 16일엔 0.406%로 떨어진 것이다. 신용등급이 두 단계나 추락한 스페인도 17일 48억8000만 유로어치 국채를 한 달 전보다 절반 수준의 금리로 매각했다. 피치에 두 단계 등급 강등을 당할지 모른다는 통보를 받은 이탈리아의 10년물 국채 유통금리도 디폴트(채무불이행)의 경계인 7% 밑으로 내려갔다. 17일 EFSF의 채권 매각 입찰도 전날 등급 강등에도 불구하고 당초 목표액 150억 유로어치가 평균 수익률(금리) 0.2664%에 모두 팔렸다. 특히 460억 유로어치의 매수 주문이 쏟아져 목표액의 3.1배에 달했다. 크리스토프 프랑켈 EFSF 부총재는 입찰 성공에 대해 “EFSF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를 확인시켜줬다”고 말했다.

무소불위의 금융권력이라는 빅3 신평사가 이번에 상대적으로 힘을 쓰지 못한 이유는 뭘까. 우선 프랑스 등 유로존의 무더기 등급 강등이 한 달 전부터 예상돼 금융시장에 이미 반영된 때문이다. 빅3도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무디스는 16일 추후 재조정 가능성을 열어두면서도 프랑스의 최고등급 유지를 재확인했다. 피치도 프랑스를 그대로 둔 채 이탈리아등 6개국의 등급 재조정만 경고했다. 클라우스 레글링 EFSF 총재는 “일개 신평사의 등급 강등에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다. 4400억 유로 규모의 EFSF 대출 여력은 줄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S&P의 무더기 등급 강등이 유로존의 재정위기 대응을 가속화한 점도 긍정적이다. 벼랑 끝에 몰린 EU는 EFSF(기금 잔액 2500억 유로)를 대체할 유럽안정기금(ESM·5000억 유로)의 출연 시점을 앞당기기로 하는 등 돌파구 마련에 속도를 냈다. EU 경제 최강국이면서도 돈 풀기엔 소극적이던 독일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210억 유로를 다섯 차례에 걸쳐 ESM에 출연하려던 계획을 일시 납입으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헤르만 반롬푀위 EU 정상회의 상임의장도 16일 마리오 몬티 이탈리아 총리와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ESM 재원 논의가 빨리 이뤄져야 한다. 원래 3월 정상회의에서 다루려던 이 사안을 1월 30일 특별회의에서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신(新)재정통합 협약(새 협약)’도 속도를 내고 있다. 반롬푀위 상임의장은 “3월 1일에는 새 협약이 발효될 것”이라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유로존 위기의 진앙지였던 그리스는 여전히 ‘시한폭탄’이다. 그리스가 구제금융을 받으려면 민간 채권단과 국채 손실분담(PSI) 50%에 합의해야 한다. 하지만 헤지펀드 등 일부 민간 채권단이 “손해 볼 수 없다”며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그리스는 구제금융이 충분치 않을 경우 144억 유로(약 21조원)의 국채 만기가 돌아오는 3월 디폴트 위기에 몰린다. 2주 안에 국채 교환 협상을 마무리하고, 2차 구제금융협정을 체결한다는 것이 그리스 정부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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