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스포츠 국보’ 양정모 금메달, 그 옆에 거북선 담배·재떨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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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훈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서울 공릉동 태릉선수촌 내 국제스케이트장 2층에 마련된 한국체육박물관(이하 박물관). 이곳에는 1976년 몬트리올 여름 올림픽 레슬링에서 양정모 선수가 따낸 금메달이 전시돼 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첫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점에서 ‘한국 스포츠의 국보’라고 할 만하다. 많은 체육인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이 받은 그리스 청동투구(보물 제904호) 못지않은 역사적 유물로 ‘양정모의 금메달’을 꼽는다.

 하지만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 중 이를 눈여겨보는 이는 극히 드물다. 메달의 가치를 설명하는 별도의 홍보자료나 안내요원이 없기 때문이다. 양정모의 금메달은 올림픽 역사를 다룬 전시실 한 켠에 방치되다시피 전시돼 있다. 명함 크기의 종이에 ‘광복 후 한국이 처음 획득한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 양정모 선수의 금메달(1976)’이라고 간략하게 소개한 것이 전부다. 메달 옆에는 70년대 국내에 널리 판매됐던 담배 ‘거북선’과 몇 점의 재떨이가 함께 놓여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이 70년대 시대상을 보여주기 위한 소품 수준의 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건국 이후 첫 금메달을 딴 양정모(왼쪽 사진 가운데)의 메달이 담배·재떨이와 함께 전시돼 있다.(오른쪽) [중앙포토], [김민규 기자]

 대한축구협회가 애타게 찾고 있던 1956년 제1회 아시안컵 우승 트로피가 남모르게 이 박물관 진열대에 12년간이나 전시돼 있었던 것(본지 1월 18일자 28면) 또한 같은 맥락이다. 최근 박물관 소장 물품을 면밀히 점검한 하웅용(체육사) 한국체대 교수는 “서적·트로피 등 일부 진열품의 경우 부식 또는 산화 상태가 심각하다. 역사적 가치가 뛰어난 몇몇 물품들은 즉각 항온·항습 장치가 갖춰진 공간으로 옮겨 전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전시 물품뿐만이 아니다. 박물관 자체도 홀대받고 있다. 한국체육박물관은 국내외 스포츠 이벤트 자료와 종목별 유물 1만5000여 점을 전시하고 있지만 이곳을 찾는 이는 드물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지고 교통도 불편한 태릉선수촌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방문객 대부분은 건물 1층에 있는 스케이트장을 찾았다가 호기심에 한번 둘러보는 사람들이다. 태릉선수촌의 한 인사는 “서류상 박물관 입장객은 하루 평균 150명 정도다. 하지만 이는 박물관이 무료 입장인 점을 감안해 스케이트장을 찾는 이의 숫자를 대입해 나온 숫자다. 실제로는 10~20명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체육박물관이 처음부터 외면받았던 것은 아니다. 2000년 박물관 개장 당시엔 도심인 서울 무교동 체육회관에 자리를 잡았다. 대한체육회는 건물 3층과 4층을 모두 박물관으로 꾸며 한국 체육의 명소로 부각시켰다.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명예위원장 등 체육계 VIP가 방한할 때 반드시 방문하는 장소로 이름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김정길 전 회장이 대한체육회를 이끌던 2005년 현재 자리로 옮겼다. 그러면서 박물관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대한체육회는 체육회관 3·4층을 일반에 임대하면 연간 2억원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한국 스포츠의 역사’를 구석 으로 밀어냈다.

 체육계 인사들은 “이제라도 박물관을 많은 사람이 찾을 수 있는 장소로 이전해 한국 체육사(史) 바로세우기에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세계 스포츠 강국으로 올라선 한국 체육의 발자취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스포츠 평론가 기영노씨는 “우리 체육계는 그간 눈앞의 목표에만 집중할 뿐 히스토리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런던 올림픽에서 몇 개의 메달을 따느냐도 중요하지만 과거의 유산을 소중히 돌보고 가치를 키워 나가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소중한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스포츠 강국인 한국의 체육 역사는 외국인에게도 꽤 흥미로운 아이템이 될 수 있다. 박물관을 도심으로 옮기고 입장료를 받아 관광명소로 만드는 방안도 생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으면 남에게서 존중받을 수 없다. ‘양정모의 금메달’을 방치해 놓고 “2012 런던 올림픽 목표는 금메달 10개 이상”이라고 외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다.

송지훈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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