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 5단지 40개 중개업소 올 거래 단 1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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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송파구 잠실주공 5단지 상가에 부동산중개업소들이 몰려 있지만 17일에도 손님이 없어 썰렁하다. [안성식 기자]

17일 오전 서울 송파구 잠실주공 5단지 아파트 상가 1층. 40개 중개업소가 몰려 있지만 손님을 보기 힘들었다. 아예 문을 닫거나 폐업한 중개업소도 여럿 있었다. 올 들어 이곳 40개 중개업소를 통해 거래된 아파트는 단 한 건뿐이었다. 이 단지의 총 가구 수는 3930가구에 이른다. 송파공인 최명섭 사장은 “예년에는 한 달에 50~60건씩 거래됐다”며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상황이 더 안 좋다”고 말했다. 인근의 잠실엘스(5678가구)도 사정은 비슷하다. 김세빈공인의 김세빈 사장은 “23년간 잠실에서 중개업을 했는데 주택 거래가 뚝 끊기다시피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연초 주택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다. 집 사겠다는 사람이 사라지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시세보다 싸게 내놔도 별 소용이 없는 상황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1~17일 아파트거래 신고는 632건이다. 설 연휴가 있어 앞으로 확 늘어날 가능성은 작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서울시 1월 평균 거래량(3600여 건)의 30%에도 못 미칠 전망이다. 2008년 금융위기 무렵에도 월 거래량이 1200건은 넘었다.

 서울 강남권 최고 인기 단지로 꼽히는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퍼스티지·반포자이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몇 개월 새 가격이 3억원 넘게 내렸다. 지난해 8~9월 16억원에 거래됐던 래미안퍼스티지 114㎡형(공급면적)이 12억7000만원에 매물로 나왔다. 인근 중개업소 사장은 “하한선을 정하지 않고 무조건 팔아달라는 집주인도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서울 최고 상승률(3.9%)을 보였던 광진구의 부동산 시장도 썰렁하다. 그린공인 박영진 사장은 “시세보다 5000만원 싼 급매물이 나와 고객 10여 명에게 문자를 보냈지만 한 명도 답이 없었다”고 말했다.

 겨울방학 때면 학군 수요가 늘어나던 노원구와 중소형이 많아 신혼부부가 많이 찾는 구로구 중개업소도 한산하긴 마찬가지다. 구로구 현대공인 방순자 실장은 “올 들어선 시세 문의 전화 한 통 없었다”고 말했다.

 주택 거래가 뚝 끊긴 것은 ‘집을 사봐야 오를 리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국토연구원에 따르면 1월 서울 주택소비심리지수는 기준선인 100 이하로 떨어졌다. 지난해 7월 조사가 시작된 후 처음이다. 국민은행의 수도권 공인중개사 체감도 조사도 2000년 1월 이후 최악이다. 국토연구원 이수욱 부동산시장연구센터장은 “경기가 침체돼 있고 물가 상승 등으로 당장 주머니 사정이 빠듯한데 누가 큰돈을 들여 집을 사려 하겠느냐”고 말했다. 취득세 인하 조치가 지난해 말로 끝난 점도 연초 거래 실종의 한 요인이다.

주택업체의 속앓이도 깊어지고 있다. 한국주택협회 김동수 정책실장은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건설사는 미분양 걱정에 당초 분양 일정을 미룰 수밖에 없다”며 “현금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건설업계의 위기감이 커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국토해양부는 지난해 말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올해 수도권 아파트 거래를 평년보다 15% 늘리겠다고 했지만, 시장은 거꾸로 가고 있다. 과거 집값이 올랐을 때 만들었던 규제는 거의 다 풀었다. 지난해 발표된 주택 관련 종합대책만 여섯 번에 이른다. 집을 두 채 이상 가진 사람에 대한 양도소득세 중과도 하지 않고 있다. 서울 강남 3구의 투기지역 해제 정도가 사실상 ‘마지막 카드’로 거론된다.

 국토부도 지난해 12·7 대책을 마련하면서 해제를 추진했다. 하지만 투기지역 해제는 대출 규제 완화와 연계돼 있어 가뜩이나 많은 가계 부채를 늘리는 부작용을 우려한 기획재정부 등이 난색을 보이면서 대책에서 제외됐다. 국토부 유성용 주택정책과장은 “유럽 위기의 여파가 실물로 튈 가능성도 있는 만큼 시장 상황을 면밀히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 상황도 녹록지 않다. 주택산업연구원 김덕례 연구위원은 “유럽 재정위기가 더욱 심각해지면서 국내 경기가 어두워지고 있고 주택시장에 별다른 호재가 눈에 띄지 않아 거래시장 침체는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엔알컨설팅 박상언 사장은 “지난해 정부의 잇따른 규제 완화도 주택 수요자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며 “양도세와 거래세 등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일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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