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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발린 말이라도 좋다 속에 칼을 품었어도 좋다 바른말 고운말을 듣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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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어제 오후 국회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과 한명숙 민주통합당 신임 대표가 만나는 모습을 TV 생중계로 지켜보았다. 오랜만에 목격하는 화기애애한 장면. 두 사람은 서로 “축하드린다” “감사하다” “많이 어려우시죠” “얼마나 바쁘시겠어요”라고 덕담을 나누었다. ‘새로운 정치의 시작’과 ‘선의의 경쟁’도 다짐했다. 줄곧 미소를 띤 표정이었다. 그런 모습에 잠깐이나마 입이 헤 벌어질 정도로 기분 좋아진 것은 내가 속이 없는 사람인 탓이 크겠다. 그러나 정치인부터 종교인·판사·교수·교사까지, 도무지 본을 뜰 만한 표상(表象)을 찾아볼 수 없는 시절에 그나마 말이라도 곱게 하는 풍경이 각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철(鐵)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누구에게 붙여야 할지 모를 정도로 이력이 간단치 않은 두 사람이기에, 어제의 따뜻한 대화는 일종의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래도 좋다. 입에는 꿀, 뱃속에는 칼을 품었다 해서 나쁘게 해석하지만 그나마 요즘 난무하는 ‘구독복검(口毒腹劍)’보다는 낫지 않은가. 선조들이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와중에도 예(禮)와 염치를 차리려고 애쓴 이유를 알 것 같다.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 일본 언론인에게 보냈다는 e-메일 고백에 따르면 김정남도 아들(김한솔)에 대해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거짓말과 마약·도박을 하면 부모 자식 간 인연을 끊겠다고 강조한다”고 한다. 자기는 도미니카 가짜 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려다 걸렸으면서 아들에게는 거짓말을 말라는 게 좀 우습다. 그러나 부모 마음이야 누군들 다르겠는가.

 중·고교생의 80.3%가 욕설·협박·조롱이 담긴 말을 쓴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된 게 지난해 말이다. 이들이 성인이 되는 몇 년 후를 걱정할 것도 없이, 이미 한다 하는 어른들도 비속어에 푹 젖어있다. 트위터나 인터넷방송에 차고 넘치는 욕설을 보라. 금방 부메랑 되어 자신들에게 날아들 것조차 걱정하지 않는다. 어떤 교수는 ‘삼보일퍽’이라는 욕설 퍼포먼스를 개발해 여의도 MBC, 광화문을 누비고 있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의 무죄가 확정될 경우 ‘적절한 책임’을 지겠다던 방송통신위원장의 행태도 구차하지만 욕설 퍼포먼스는 그것대로 교수가 할 짓이 아니다.

 말을 더럽히는 사람들은 흔히 “더 큰 잘못을 응징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옛날 기층민중도 욕설로 지배계급을 조롱하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둘러댄다. 다 군색한 변명이다. 정말 그렇게 여긴다면 자기 집에서, 자기 애들 앞에서 매일 욕지거리든 성기묘사 퍼포먼스든 해보시든지.

 입에 발린 말이라도 좋으니 제발 부드럽고 온화한 말들을 많이 듣고 싶다. ‘바른 말 고운 말’이라는 고색창연한 관용구는 이제 정치판에서도 학교에서도 수명이 다한 것일까.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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