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 남자를 향한 광기의 사랑

중앙일보

입력

고규홍 Books 편집장

문학의 영원한 주제는 아마 남녀상열일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 그 간단한 진행 과정 안에는 세상 사람의 숫자만큼의 차이들이 있겠지요. 대개 서로 비슷한 유형이지만 아주 미묘한 차이를 가지거나, 때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독특성을 가지는 형태일 수 있지요.

스테판 츠바이크의 중편소설 〈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에서 보여주는 남녀간의 사랑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일 지, 아니면 대단히 독특한 형태일 지 생각해 봅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한 소설가가 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저를 결코 알지 못하는 당신께'라는 첫 마디로 시작되는 두툼한 편지를 받습니다. 편지를 보낸 여인의 표현처럼 이 소설가는 그 여인을 생각해 내지 못합니다. 서둘러 편지를 읽는 것으로 이 소설은 시작됩니다.

"제 아이는 어제 죽었답니다"로 시작되는 여인의 편지는 뭔가 불길한 예감부터 갖게 합니다. 죽은 아이 앞에서 편지를 적은 이 여인은 아이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그 아이의 죽음 뒤로 자신이 살아남아야 할 까닭을 찾지 못하게 됨으로써 마침내 자신도 죽게 될 것임을 알립니다. 그리고는 열 세 살 때부터 15,6년 동안 그 소설가만을 사랑하며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냅니다.

이 소설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소설가를 향한 한 여인의 절절한 사랑입니다. 열 세 살 어린 소녀의 집 이웃으로 소설가가 이사를 오면서부터 사건이 벌어지지요. 소녀는 심지어 "저에게 세계는 진정 그때부터 시작"됐다고 술회합니다.

소녀가 사는 곤궁한 마을에 먼저 들어온 것은 소설가의 이삿짐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굉장히 많은 책들이 쌓여 있었지요. 소녀는 당시 값싼 책 12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걸 읽고 또 읽어서 두꺼운 표지가 다 해져가는 상태였지요. 그런데 소설가의 이삿짐에는 상당히 많은 훌륭한 책이 있었어요. 소녀는 그 책의 주인은 아직 보지도 못했지만, 그 많은 책을 가진 분에 대해 신성한 존경심을 갖고 기다립니다.

다음 날 소설가가 그 곤궁한 마을에 등장합니다. 소녀는 "너무나도 젊고 아름다우며 날씬한" 소설가의 모습에 호감을 갖게 됩니다. 그 "스물 댓살 쯤"으로 보이는 그 소설가의 모습은 "유희와 모험에 몰두하는 뜨겁고 발랄한 젊은이이자, 동시에 예술에 있어서는 준엄하고 박식하며 의무감이 강하고 무한한 교양을 쌓은 남자, 말하자면 어딘지 이중적인 인간성의 소유자"와 같은 첫인상을 소녀에게 남깁니다.

그 날 이후로 어린 소녀는 이웃의 소설가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소녀의 집 열쇠 구멍을 통해 소설가의 동정을 살피면서 세월을 보냅니다. 소설가의 손이 닿았던 손에 입맞춤 하기도 하고, 때로는 소설가가 버린 담배꽁초를 집어가기도 합니다. 밤에는 골목으로 뛰쳐나가 소설가의 방 어느 창에 불이 켜 있는지를 살피는 것도 소녀의 일과가 되지요.

그러나 스물 다섯의 젊은 소설가의 눈에 열 세 살 어린 소녀가 들어올 리 없지요. 그렇게 몇 년이 흘러갑니다. 소녀는 이제 열 일곱의 성숙한 처녀가 됩니다. 처녀는 여전히 소설가의 곁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그 소설가가 집에 돌아오는 길목에 버티고 서서 맞이합니다.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그 소설가를 느끼고 싶었던 까닭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소설가는 길에서 만난 그 처녀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고,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합니다. 그러나 그 처녀가 누구인지는 전혀 모르는 상태이지요. 그런 상태에서 소설가는 자신의 집으로 처녀를 초대합니다. 그 소설가를 그토록 흠모했던 처녀로서는 즐겁게 초대에 응하지만 곧바로 그토록 가볍게 남자의 청에 응한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아채지요. 자신이 '매춘부'처럼 굴었음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러나 처녀는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느니 어리석은 매춘부처럼 보이면서라도 소설가와 하룻밤을 지내고 싶었던 겁니다.

소설가는 그 밤 이후의 약속을 정해 두 번을 더 만나 밤을 지냅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면서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지만, 결코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처녀는 아이를 낳게 됩니다. 바로 그 소설가의 아이이지요. 이 편지를 쓰던 바로 전 날 죽은 아이가 바로 그 아이였던 것입니다.

한 남자를 진정으로 사랑해서 얻은 아이에게서 여인은 소설가를 느끼고, 그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립니다. 아이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여인은 몸을 팝니다. 매춘부처럼은 아니지만, 돈 많은 남자 친구들에게 몸을 파는 댓가로 돈을 구했던 거죠. 그 중에 나이 든 어느 백작은 여인에게 청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언젠가 그 소설가가 자신을 다시 찾을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로 청혼을 거절하지요.

그리고 이 편지를 쓰던 때로부터 1년 쯤 전에 다시 그 소설가를 만나게 됩니다. 어느 댄스홀에서였지요. 명랑한 사교계 인사들이 모이는 그 댄스홀에서 그 소설가는 10년 전에 자신과 밤을 지냈던 여인을 여전히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그 여인을 유혹하지요. 소설가의 유혹의 눈빛을 여인은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입니다.

10년 전의 그 날처럼 여인은 소설가의 품 안에서 지고의 행복감을 느끼지만 소설가는 돌아가려는 여인의 팔장갑 안으로 고액화폐를 몇 장 집어 넣는 것으로 밤을 마무리합니다. 여인은 마음 속으로 '제발 좀 알아봐 주세요'라고 소리치지만, 소설가는 결코 여인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편지 속 여인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이제 삶을 다 한 듯 죽어갑니다. 소설가가 이 편지를 다 읽기 전에 생명을 다 할 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한 남자를 지독하게 사랑했던 여인의 고백이자 유언의 편지입니다.

한 여인의 심리상태를 그려내고 있는 이 소설은 이런 줄거리만으로도 감동이 있을 지, 그건 독자의 몫이지요. 이 한 여인의 남자를 향한 지독한 연애 심리, 그건 실제로 이 소설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진지한 서사가 살아있는 소설을 보기 힘든 요즘, 이처럼 진한 연애 소설 한 편은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이 소설은 몇 번의 출간과 절판을 거듭했어요. 예전에 어느 문고판으로 나왔다가 절판된 게 처음이고, 다음에는 다른 두 편의 중편과 합쳐서 〈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원당희 옮김, 고려원 펴냄)라는 제목으로 나왔고, 그 다음에 나온 것은 지난 96년에〈달밤의 뒷골목〉〈감정의 혼란〉등을 합쳐 〈감정의 혼란〉(박찬기 옮김, 깊은샘 펴냄)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소설집입니다.

▶〈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가 수록된 츠바이크 소설집
* 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원당희 옮김, 고려원 펴냄)
* 감정의 혼란(박찬기 옮김, 깊은샘 펴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