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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열편의 만화 읽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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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대부분 휴가가 끝났을 것이다. 바쁘게 일상에 복귀하지만 몸의 리듬이 잘 따라오지 않는다. 추석 연휴도 코앞이다. 어수선하다. 이럴 때에 만화를 읽으면서 차분하게 다시 일상을 추스리는 것은 어떨까. 장르별로 10편의 만화를 골랐다. 그러나 이 만화들의 장르는 불분명하다. 최근 만화의 추세는 다양한 장르끼리 서로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명확하던 장르의 용어가 이제는 불명확해졌다. 예전의 장르틀을 빌리면 '추리멜로판타지SF'라는 허황한 설명이 나오게 된다. 아래에 붙은 장르에 대한 설명은 만화를 이해하기 위한 짧은 예시문에 불과하다. 문제는 작품이고, 그 작품을 읽는 것은 바로 우리다.

일상에서 건져 올린 로맨틱 멜로
한혜연 〈금지된 사랑〉 서울문화사

2000년 1월에 마지막 권인 2권이 완간된 따끈한 신작이다. 〈나인〉에서 연재된 작품으로 늘리기 없이 간결하게 마무리되었다. 한혜연은 1993년 데뷔한 이후 간단한 희화체 만화를 발표하다 90년대 후반 공포와 미스테리라는 국내 작품에서 보기 드문 실험을 시작하며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갔다. (공포와 미스테리는 인간의 내면에 도달하지 않고 재미를 줄 수 없는 장르다) 'Illusion 시리즈'로 대표되는 공포, 미스테리 물을 주로 작업하면서 한 편으로 일상에서 건져내는 감정의 흐름을 그린 단편들을 발표했는데, 〈금지된 사랑〉은 후자의 맥락에 서 있는 작품이다. 작가가 보여주는 섬세한 감정의 흐름은 그 섬세함으로 인해 탁월한 전염력을 지닌다. 사랑이란 달콤하고 극적인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사랑은 일상에서 건져 올려진 감정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작품이다.

절대악이 등장하는 미스테리 액션
우라사와 나오키 〈몬스터〉 세주문화사

우라사와 나오키는 국내에 많은 고정 팬을 가지고 있는 작가다. 열혈 스포츠물의 단골 소재인 유도와 테니스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야와라〉와 〈해피〉로 대중적 사랑을 얻었지만 대표적인 역시 〈몬스터〉다. 이 작품의 기본 구조는 요한-텐마-룽게의 추격이다. 텐마라는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의사가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도망자가 된다. 텐마가 누명을 푸는 유일한 방법은 진범을 잡는 것. 그리고 도망자를 치밀하게 추격하는 형사가 등장한다. 60년대의 인기 TV 시리즈였다가 해리슨 포드 주연의 헐리우드 영화로도 제작된 〈도망자〉와 매우 닮아있다. 〈몬스터〉는 〈도망자〉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왔다. 그러나 〈도망자〉와 전혀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텐마가 추격하는 요한은 구동독시절 고아원에서 시험적으로 양성된 인간들 중 절대악의 화신이다. 텐마가 요한을 추격하는 와중에 벌어지는 살인에는 요한이 개입되어있다. 요한의 살인은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절대악의 살인이다. 도대체 절대악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작가는 〈몬스터〉를 통해 그렇다고 대답한다. 〈몬스터〉는 절대악과 인간의 추격, 그리고 거기에 존재하는 인간적인 것들과의 조우를 그리고 있다.

삼각관계가 등장하는 청춘물
아다치 미츠루 〈H2〉도서출판 대원

아다치 미츠루의 대표작으로 국내에 라이센스 출판된 〈H2〉. 잘 지은 제목은 작품이 상당부분을 설명해 주는데, 'H2'라는 제목도 마찬가지다. 〈H2〉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들의 이름은 모두 영어 'H'로 시작되는데, 〈H2〉는 'H'로 시작되는 캐릭터들(히데오와 히로, 히데오와 히까리, 히로와 히까리, 히로와 하루까)의 '관계'를 말한다. 아다치 미츠루의 다른 작품처럼 이 작품에도 삼각관계가 드러난다. 그리고 이 삼각관계에서 발산하는 감정의 잔재미를 작품 속에 그려 넣었다. 야구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실은 친구들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부딪침을 보는 재미가 크다. 야구 만화가 아니라 삼각관계로 작품을 이끌어가는 청춘물.

휴먼 드라마
야마모토 오사무 〈머나먼 갑자원〉 서울문화사

세상은 살벌해졌다. 엽기와 잔혹같은 낯선 이름이 아무렇지도 않게 불려진다. 피와 살점이 튀는 장면도 일상적이 되어버렸다. 인터넷에는 '시체사이트'들도 있다. 살벌한 마음을 치유할 시같은 만화가 야마모토 오사무의 〈머나먼 갑자원〉이다. 1965년, 일본 땅이면서도 일본 땅이 아닌 변방의 미군 점령지 오끼나와에서는 미군 기지에서 흘러나온 전염병 풍진에 걸린 산모에게서 태어나 청각 장애를 일으킨 풍진 장애아들이 태어났다. 그 아이들 중 몇몇은 야구를 했다. 모두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비웃었지만 야구를 향한 아이들의 꿈을 꺾을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후쿠사토 농아학교에 진학해 야구부를 만들고, 야구연맹에 가입하고, 경기를 했으며, 1루를 밟았고, 1점을 얻었으며, 1승의 문턱에까지 다가가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은 불가능하다는 정상인들의 편견을 스스로 이겨내며 성취한 일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들의 성취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 작품은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며, 나와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자기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이야기한다. 야구부원, 학부모, 농아학교 야구부의 코치, 교장선생님 그리고 정말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머나먼 갑자원〉은 불타오르는 갑자원 대신 사람을 노래한다. 그래서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

청춘의 성장을 그린 성장만화
박흥용 〈내파란 세이버〉 도서출판 대원

〈내파란 세이버〉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으로 강호에 다시 등장한 박흥용의 세 번째 작품이다. 박흥용은 작품에 하나 이상의 화두를 담고, 그것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데, 이번 작품의 화두는 '생명'이다. 작가는 이야기를 통해, 등장인물을 통해, 대화를 통해, 배경을 통해 작품 시작과 함께 의문부호로 내던진 '생명'에 대한 논의를 조금씩 확장시킨다.
비행기 파일럿이 되고 싶다는 쌕쌕이 최대한이 사이클을 접하며 '속도'를 지배하고, 제어하는 방식을 배워간다. 그래서 이 만화의 겉모습은 탁월한 사이클 선수로 타고난 쌕쌕이의 성장기로 스포츠 만화, 성장 만화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박흥용은 불온한 경계의 대상으로 죄악시 되어왔던 사춘기의 욕망을 작품 속에 당당히 복권시켰다. 키와 힘이 성장하는 쌕쌕이는 소년에서 어른으로 경계에 위치하며 그를 둘러싼 여자들에게 복잡한 감정의 변화를 느낀다. 자연스럽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쌕쌕이의 성장에는 사이클과 여자들이 함께 한다. 여자들에 대한 미묘한 감정의 변화, 그것은 사춘기의 욕망으로 제어되어야할 불온한 감정이었다. 박흥용은 〈내파란 세이버〉를 통해 그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생명의 과정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을 꼼꼼히 읽어가면 가슴 큰 여자, 귀여운 여자들이 등장하는 트렌디 청춘연애물들이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사춘기의 미묘한 변화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만화를 그린 만화의 만화
박무직 〈툰〉 서울문화사

〈툰〉은 만화를 만화로 그리는, 꿈을 꿈에서 보는 것과 마찬가지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주인공 신혜는 만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패스'라는 동아리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때부터 여러 만화에서 보았음직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펭귄맨 이야기는 〈배트맨〉, 〈슈퍼맨〉과 같은 미국 히어로물의 모양을 닮아있다. 란마와 택진의 로맨스는 그대로 로맨스물의 구조이며 혜성의 이야기는 학원격투물이다. 매 연재마다 우리 눈에 익숙한 만화 표지들이 패러디로 등장한다. 작품의 마지막, 패스의 멤버들은 신혜를 남겨놓고 만화의 세계로 돌아가겠다고 이야기한다. 현실이라 믿었던 만화의 세계가 현실에서 퉁겨져 나간다. 그러면서 만화 주인공 신혜는 만화의 세계에서 현실의 우리 곁으로 들어온다. 만화에 또 다른 만화가 있고, 그 만화와 현실이 미묘하게 엇갈리는 재미있는 만화의 만화.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 SF
권교정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 도서출판 대원

제목만 미루어 짐작해 보면 코믹SF처럼 보이지만 이 만화는 정말 진지한 작품이다. 〈헬무트〉라는 중세만화로 데뷔한 이후 여러편의 재치있는 단편을 선보인 작가는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를 통해 인간에 대해 질문한다. 이 작품의 핵심은 '진화하는 영혼'이라는 개념. 주인공 디오티마는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오르는 진화하는 영혼이다. 또한 디오티마는 이동 우주 스테이션의 이름이기도하다. 진화하는 영혼 디오티마와 이동식 우주 스테이션(나머 함장이 우주함선이라 부르는) 디오티마를 축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그 안에 무수한 가지를 뻗치며 인간의 이야기를 전한다.

인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담은 미스테리
이정애 〈Bath & Shower〉 서울문화사

작가 스스로 '철학적 게임을 강조한' 작품이라 부른 〈Bath & Shower〉는 신과 인간, 선과 악이라는 철학적 사유를 필요로 하는 작품이다. 엘리시온파라는 조직이 있다. 이들은 시온에게서 임무를 받고 살인을 한다. 모임의 누구도 시온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시온이 있고 그들은 시온의 명령으로 사냥을 한다. 문평 학회 회원들을 사냥하기 위해 간 홍천에서 악의 바이러스가 그들 중 누군가를 숙주로 삼아 시온의 행동을 방해하려고 한다. 독자들은 시온과 악의 바이러스라는 두 존재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주인공 격(최후까지 살아남은 인물)인 도일과 도일이 시온이라 믿고 사랑하는 희운, 도일에 의해 나약하다 공격받은 커트(커트 코베인)족 혜리에 의해 진행된다. 대단원도 마찬가지다. 읽는 사람에 따라 작품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사냥과 행동, 계획은 미지수다. 시온이라는 존재도 마찬가지. 그 해석의 여지가 바로 작가 이정애가 이야기하는 '철학적 게임'이다. 철학적 게임은 바로 표면적인 직접성을 뛰어넘는 〈Bath & Shower〉의 재미다.

유쾌한 풍자명랑만화
이우일 〈도날드닭〉 홍디자인

〈동아일보〉에 연재되며 유명해진 바로 그 도날드닭의 이야기. 디즈니의 캐릭터 도날드 덕과 '닭(!)'을 합성시킨 이 패러디 캐릭터는 이우일의 일러스트에 종종 등장한 주인공이다. 신문에 연재되면서 독특한 맛이 많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멍청한 자본가와 국회의원, 그리고 중산층을 겨냥한 시니컬한 풍자가 매력적이다.

독특한 한국풍 퇴마물
윤인완, 양경일 〈아일랜드〉 도서출판 대원

〈소마신화전기〉의 양경일이 선보이는 한국풍 퇴마물. 제주도라는 고립된 지역에서 발생하는 귀신들과 인간의 전투를 그렸다. 퇴마물의 핵심은 매력적인 퇴마사의 개성에 있는데, 〈아일랜드〉는 밝고 명랑한 요한과 우울하며 우수에 찬 반을 등장시켜 언밸런스 듀오의 매력을 활용했다. 작가 특유의 치밀하고 완벽한 화풍은 이 만화의 큰 매력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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