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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화두 풀어내는 수행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53호 27면

전남 장성군 황룡면의 작업실에서 만난 범해 김범수(원광대 교수) 화백. 보이차 한 잔을 따르는 그의 손길은 투박하면서도 섬세했다. 이야기 도중 22현 가야금을 꺼내 진설한 뒤 반야심경에 곡조를 붙여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다. 작업실은 이내 선방이 됐다. 방 기운 역시 침잠하면서도 온화함이 자리 잡는다. 그는 곡 연주를 마친 뒤 음악과 그림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삶과 믿음

“음악을 연주하다 보면 몰아에 빠집니다. 이에 반해 그림은 자기 내면세계와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화두를 풀어 나가는 수행입니다.”
재료의 유희와 기량에 빠지면 좋은 그림을 그려 낼 수 없다고 한다. 깊이가 없다는 말이 된다. 이와 달리 끊임없이 적절한 색을 만들어 내고 완벽한 아름다움을 찾아나가는 것이 그림이라 볼 수 있다.

“대가들은 그 시대를 대변하는 미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학·과학·종교가 내포돼 있죠. 대표작들은 몇 점 되지 않습니다. 대표되는 한 점을 그려 내기 위해 무수히 많은 그림을 그린 것이죠. 좋은 그림을 보면 숭고하고 고귀함이 느껴집니다. 좋은 그림은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돌가루를 사용하는 전통 석채기법으로 풍경·인물·꽃 등을 그리지만 그의 작품 대부분은 선(禪)의 고요함과 활발함이 깃들어 있다. 여여일심(如如一心)에 접어들게 한다. 그는 방 정리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 매일 아침 먼지를 떨어내고 바닥을 말끔히 한다. 그에게는 일상이 수행이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기만의 색깔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석채는 20년 넘게 써 봐야 원하는 색이 나옵니다. 한 점 한 점 완성해 놓으면 환희심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림의 한 단계를 넘어서면 수도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각진국사, 태고보우국사, 의천국사, 혜능대사 및 임제대사 등의 진영(眞影)을 복원하고 제작하는 데도 그 마음은 여일했다. 선을 하는 심경이었다.

“복원사진을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성안(聖顔)이 뚜렷이 떠오릅니다. 마치 선을 통해 무언가를 얻는 것 같습니다. 내면세계가 교류됐다는 것이지요. 법정 스님의 진영을 그릴 때는 정신세계가 교류된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 기운이 친견하는 불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아요. 100년 후 법정 스님을 잊을지라도 진영을 통해 다시 그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지요. 이것을 생각하면 너무 행복합니다.”

그의 작품은 정(靜) 속에서 동(動)의 움직임이 이미지화돼 있는 것 같다. 성안을 묘사하는 것이 그에게는 선(禪)이다. 주름 하나 피부색을 묘사하는 것도 그에게는 수행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 성성한 기운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30초 안에 혼침(昏沈·수행하다가 깜빡 조는 것) 상태에 들어갑니다. 30초 하다가 쉬었다 하죠. 무심무념의 상태에서 그린 그림은 좋은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림은 화두를 풀어내는 과정입니다.”

그가 3개월 동안 천연 석채를 사용해 복원한 영암의 남해신사 해신도(海神圖) 역시 신성함의 표현이었다. 청룡은 여의주를 손에 쥐고 있고 황룡은 여의주를 장난감 삼아 놀고 있는 복원 그림에서 그의 자연스러움이 드러난다. 여의보주는 마음의 자유스러움에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밖을 나오니 돌 절구통을 메워 만든 연꽃 계단이 눈에 띄었다. 이것은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그의 마음 표현이다.



육관응 원불교신문 편집국장. 글쓰기·사진을 통해 명상과 알아차림을 전하고 있다. 숲과 들을 접시에 담은 음식이야기, 자연 건강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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