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전화번호 몰라 신고 못하는 줄 아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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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성시윤
사회부문 기자

이명박 대통령이 14일 청와대에서 모든 정부 부처 장·차관과 청장 등을 불러 ‘2012 합동 워크숍’을 연다. 지난해 말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 이후 다시 불거진 학교폭력에 대한 대책과 청년 일자리 확대 등을 집중 논의한다고 한다. 대통령이 모든 부처 수장을 불러 학교폭력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그만큼 문제가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이에 앞서 정부와 한나라당은 11일 국회에서 학교폭력 관련 첫 당정협의회도 열었다. 여러 부처에 분산된 신고전화를 ‘117’로 통합한다는 내용을 대책으로 내놨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쉽게 신고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라는 게 이유였다. 나름 좋은 방안이다. 하지만 본지의 ‘멈춰! 학교폭력…학교·가정·사회 세 바퀴 운동’에 동감하며 독자들이 보내온 수백 통의 e-메일에는 ‘117 대책’을 꼬집는 내용이 많았다.

 “피해자들이 전화번호를 몰라 신고 못한 게 아닙니다.”(경주의 한 엄마)

 “교사와 상담 없이 신고부터 하면 학교가 도와줄까요?”(전주의 한 교사)

 “정부가 학교를 몰라요. 학생들 목소리부터 들으세요.”(서울의 고3 학생)

 e-메일에는 왕따 체험기도 많았다. 하지만 신고전화 한 통으로 고난을 이겨냈다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중학생 딸이 왕따를 당했었다고 밝힌 서울의 한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학교도 쉬쉬하고, 아이는 보복이 두려워 얘기를 하지 않아 2년을 모르고 지냈어요. 엄마로서 자괴감이 들어 엉엉 울었어요.”

 학교폭력 근절은 해묵은 과제다. 2004년에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고, 2005년과 2009년에는 정부가 ‘학교폭력 예방 종합대책 5개년 계획’도 발표했다. 그렇지만 달라진 게 거의 없다.

 정부가 예전에 발표한 종합대책들을 찾아봤다. 각각 70쪽에 달하는 분량이다. 이들 문건에는 ▶예방교육 부족 ▶교사의 대처능력 부족 ▶학교·가정·사회의 미온적 대처 ▶가해 학생에 대한 약한 징계 등 최근 드러난 문제점들이 판박이처럼 담겨 있다. ▶유치원부터 예방교육 의무화 ▶직장인 학부모 대상 교육 강화 ▶가해 학생 학부모 특별교육 등 교육당국이 요즘 부랴부랴 내놓는 대책도 대부분 있었다.

 어찌된 일일까. 해답은 자명하다. 학교폭력의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은 정책이 잘못돼서가 아니라 정책을 현장에 녹아들게 하는 실천 노력과 연속성이 없는 데 그 근본 원인이 있다. 겉만 건드리는 땜질식, 여론 달래기용 정책에만 매달려 환부의 본질을 도려내지 못하는 것이다.

정부는 과거의 실패에서, 그리고 현장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정부는 이달 말 또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을 내놓겠다고 예고했다. 답은 과거에 있고 또 학교 현장에 있다. 학부모와 학생의 마음이 담기지 않는 백화점식 정책이라면 또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피해 학생 가족의 절망감을 높으신 분들이 알기나 하나요?” 40대 엄마가 본지에 보내온 e-메일의 끝맺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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