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연인] '와호장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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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호장룡〉이란 영웅과 전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다는 고대중국의 속담이라고 한다.

언젠가 황폐한 중국 서쪽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옥수수밭이나 사막, 사람의 자취는 보이지 않는 구릉지대들이 몇시간씩 끝도 없이 이어지는 걸 봤을 때 여기서라면 숨어 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럴 것이다. 그 곳이라면 보이지 않는 곳에 영웅이나 전설이 숱하게 숨어 있을 것이다.

내가 중국과는 전혀 다른 풍광이 펼쳐졌던 여행에서 돌아와 어떤 영화를 봐야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와호장룡〉을 추천했다.

와호장룡? 내가 의아해하는데 그이는 감독이 리안이라고 했다.

결혼피로연과 음식남녀가 떠올랐으며 인상깊게 본 영화들이었으므로 더 고민없이 여독이 가시지도 않은 몸을 끌고 영화관을 찾아갔다.

보는 동안 내내 든 생각. 정말 이 영화를 만든 리 감독이 〈음식남녀〉 와 〈결혼피로연〉을 만든 그 감독 맞나? 싶은 거였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리 완벽하게 변실할 수 있는 것은 재능이니까.

리 감독이 중국대륙의 광활한 자연풍광 속에 숨어있는 영웅과 전설을 캐내어 그 속에 두쌍의 연인을 배치시키면서 가장 중점을 뒀던 대목은 기존 무협영화의 틀을 배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남성들이 주류를 이루고 여성은 장식품에 불과했던 기존 무협영화와 〈와호장룡〉은 판이하게 다르다.

오히려 영화에서 저우룬파(周潤發)은 그저 조연에 불과하다 싶을 정도로 활약이 미미하며 사랑을 쟁취하거나 버리는 과정도 여성이 압도적으로 이끌어간다.

신선하고 아름다운 장쯔이(章子怡)와 깊은 눈매를 가진 연륜의 양쯔충(揚紫瓊). 무협영화에서 이토록 여성이 주제가 되어 사건을 파생시키고 풀어나가고 결말에 도달하는 경우가 있었는지.

물론 두 여성 사이에는 저우룬파를 사이에 둔 심리적 대결이 그늘져 있지만 두 사람은 각각 무엇에도 속하지 않은 채 독립적이다.

남성에 의해서 운명이 바뀌지도 않으며 외려 장쯔이의 경우에는 머리빗 하나 때문에 마적패를 끝까지 따라붙는 독함을 내보이기도 한다.

어떤 대목은 너무 친절해서 해독이 과하고 어떤 대목은 비약이 심해서 서사가 단절되는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 아름다운 두 여성이 이끌어가는 무협영화를 보는 재미는 쏠쏠했다.

때로 이 둘이 연인이 아닌가 싶은 오해를 불러올 만큼.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안 감독이 이 무협 영화를 어떻해서든 서양인들의 구미에 맞게 해보려고 한 의도가 엿보인다.

사사삭, 대나무 위에서 저우룬파과 장쯔이의 한판 승부는 아름답고 고혹스러웠으나 그들이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보다 서양인들의 눈을 호사시킬 장면으로 따로 만든 것 같은 느낌까지 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파란여우의 독침에 감염된 저우룬파가 양쯔충에게 남기는 말.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했고 죽은 후에도 당신의 사랑이 있기에 따뜻하다는 말은 그동안 내용으로 봐서 해독 불가능한 말이다.

오히려 결말의 그 말 때문에 그동안 유지시켜줬던 순간순간의 긴장감이 느슨해지며 의문부호가 따라 붙는다.

정말 저우룬파는 장쯔이를 제자로 삼기 위해서만 그토록 마음이 흔들렸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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