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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돕는 슬기로운 살림살이

중앙일보

입력

오늘은 물푸레나무 이야기를 처음 시작하면서 여러분께 내 드렸던 수수께끼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 내 드렸던 수수께끼를 다시 정리하자면 물푸레나무과의 목서와 호랑가시나무를 어떻게 구별하느냐 하는 것이었지요.

목서의 이파리는 호랑가시나무의 이파리와 매우 비슷해서 처음 보는 사람은 감탕나무 (Ilex) 계열의 호랑가시나무와 구별하기 어렵답니다. 두 나무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파리가 자라나는 모습입니다.

목서는 이파리가 하나의 가지에서 서로 마주하고 나옵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이야기하면 대생배열(對生配列)이라고 합니다. 호랑가시나무는 그와 달리 이파리가 서로 어긋나며 나오지요. 이를 호생배열(互生配列)이라고 합니다. 언뜻 봐서는 전혀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가만히 살펴 보면 차이를 알 수 있어요. 옆의 사진에서 그 차이를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얼마나 잘 보일 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한번 꼼꼼히 봐 주세요. 그러면 보일 것입니다.

더 자세히 보면 참 재미있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어요. 이파리들이 자라나는 데에도 놀랄 정도로 정확한 규칙이 있다는 겁니다. 새로 나는 잎은 먼저 난 잎의 줄기 위쪽에서 나오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먼저 난 아래 쪽의 이파리는 새로 난 이파리 때문에 햇빛을 받지 못하게 될 것 아니겠어요. 햇빛을 온전히 받지 못하는 아래 쪽 이파리는 식물의 생명을 존재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광합성을 하기 힘들게 될 것입니다. 광합성이란 식물들이 영양분을 취하는 방법 아니겠어요? 그래서 위쪽으로 나오는 이파리들은 아래쪽 이파리의 영양 섭취를 위해 아래 쪽에 난 이파리와 정확히 직각을 이루면서 돋아납니다.

자신도 살아야 하지만, 자기보다 먼저 난 이파리의 생존을 최대한 배려하는 방식으로 돋아나는 것이지요.

다시 잡으려 해도 소용없는
시간 속으로 나는 되돌아갈 수 없으며
잃어버린 시간들을 다시 찾을 수도 없다
변해버린 사람과 깨어진 사랑
속에서 나는 걸음을 옮겨야 한다
남루한 저고리를 걸치고 모자를 쓰고
물푸레나무 우거진 길로, 물 속으로
이슬비 내리는 둑에서 나는 보아야 한다
세상이란 좋은 것이다
- 최하림, '아들에게' 에서

우리가 자연을 다시 돌아보는 까닭은 이런 데에 있는 듯 합니다. 〈곤충기〉로 유명한 파브르가 〈식물기〉를 썼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식물기〉는 파브르가 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집필했던 미완성 걸작으로 한글 번역본도 나와 있습니다. 그 책은 제가 창간 준비호에서 한번 이야기했던 적이 있지요. 제게는 참 좋은 책입니다.

파브르는 "생애 10년 동안, 그것도 인생의 가장 꽃다운 나이의 어린이들에게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우게 하는 것은 너무 치명적이다. 신이 만든 자연을 배우고 이해하는 일이 라틴어의 접속법을 외우는 일만큼이나 가치가 없단 말인가?"라며, "자연으로부터 삶의 신비와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합니다. 〈곤충기〉를 쓸 때도 그러했던 것처럼, 자연으로부터 삶의 슬기로움을 배우자는 태도이지요. 자녀들에게 편지를 쓰듯 쓰여진 〈식물기〉는 그래서 식물의 살림살이를 통해서 사람의 살림살이의 지혜를 깨닫도록 해 줍니다. 더구나 아주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좋은 책입니다.

천리포수목원에는 목서를 포함해 여러 그루의 물푸레나무가 있습니다. 물푸레나무는 물빛을 하늘빛으로 푸르게 물들인다는 점에서도 벌써 시원한 느낌을 주는 나무입니다. 천리포수목원 식물부장 정문영 님은 물푸레나무는 여름에 바라보는 것만으로 냉기를 느끼게 하는 시원한 나무라고 극찬합니다.

천리포수목원은 면적이 18만평 규모인데, 이 곳을 관리하는 직원은 겨우 14명 밖에 안되지요. 그 분들이 한 여름 나무들을 돌보느라 구슬땀이 맺혔을 때 이 물푸레나무에 매달린 이파리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면 곧바로 땀이 식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렇게 고마운 나무이건만 워낙 나무 줄기의 재질이 좋아 오래도록 자라지 못하고 사람들의 손에 잘려나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모난 돌이 정 맞고, 좋은 나무가 도끼 찍힌다'는 옛말이 꼭 맞는 것이지요. 물푸레나무는 농사를 천하의 근본으로 여겨왔던 우리 조상들에게 가장 먼저 도끼에 맞을 정도로 좋은 나무였던 것입니다. 별다른 특징도 없이 물푸레나무는 우리 곁에서 우리 삶과 보금자리를 그렇게 지켜주었던 겁니다.

물푸레나무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소년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얘야, 미안하다. 이제는 네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사과도 없고 네가 그네를 뛸 가지도 없고, 타고 오를 줄기도 없어. 미안해. 무언가 네게 주었으면 좋겠는데, 내게 남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나는 다만 늙어버린 나무 밑둥일 뿐이야." 소년은 말했습니다. "이제 내게 필요한 건 없어. 난 몹시 피곤할 뿐이야." 나무는 안간힘을 다해 굽은 몸뚱이를 펴며 말했습니다. "아, 그래. 앉아서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둥이 그만이야. 이리로 와서 앉으렴. 앉아서 쉬도록 해." 소년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 쉘 실버스타인,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서

고규홍(gohkh@joins.com)

〈다음 호에서는 물푸레나무의 신화를 이야기하겠습니다. 물푸레나무의 신화는 다른 나무의 신화보다 훨씬 웅대한 스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신화에서는 유럽의 신 오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진=올 4월 천리포수목원에서 필자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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