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가 이회창 실패서 배워야 할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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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호 30면

대세론은 막강하다. 한 번 등장하면 상대방은 속수무책에 빠진다. 대세론 자체가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선거판의 흐름을 결정한다. 하지만 실체는 모호하다. 굳이 따지자면 ‘높은 당선 가능성’이다. ‘싸워 보나 마나 그 사람이 될 거야’란 상황이 오래가면, 그래서 뒤집힐 가능성이 희박해지면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대세라고 부른다. 그러니 대세론을 업었다면 이기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이긴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는 ‘YS 대세론’의 수혜자였다. 하지만 2002년 선거전에서 ‘이회창 대세론’은 ‘노무현 바람’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

최상연 칼럼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면 그런 개념은 왜 생겨난 것일까. 대세론은 ‘한국적’ 현상이다. ‘왜(why) 그 사람이냐’라기보단 ‘누구(who)냐’를 묻는 게 우리 선거 풍토다. 유권자가 인물 중심의 선택을 하다 보니 생겨난 ‘3김(金) 정치’의 유산이다. 정책이나 공약에 대한 적극적 지지라기보다 “도대체 다음 대통령은 누구냐”는 조급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 대세론을 만든다. 그러니 현재 지지율이 높아 대세론을 탔어도 대세론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 막강하지만 불안정한 게 대세론이다.

한나라당에서 나오는 총선·대선 필패의 위기감은 그런 불안감이 출발점이다. 여권의 대선 레이스는 여전히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의 독주체제다. 박 위원장이 연말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될 가능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대세론만으로도 왠지 불안하던 참에 안철수 바람을 맞았다. 악재가 꼬리를 무는 당내에선 “차라리 안철수 당이 생겨 야권 표가 분산되는 게 살길”이란 푸념이 나온다. 한마디로 한나라당은 겁을 먹었다.

탈출구는 무엇일까. 당내엔 ‘이회창 대세론’의 부침에서 힌트를 찾으려는 사람이 많다. 10년 전 이맘때 절정이던 ‘창(昌) 대세론’은 대선을 코앞에 두고 크게 흔들렸다. 이회창 캠프가 마련한 대책 중 하나는 ‘개혁 내각’ 구상이었다. 국민에게 인기 높은 사회 각계의 개혁인사를 불러 모아 ‘이회창 정부의 초대 내각’을 대선 전에 발표할 생각이었다. 이와 함께 이 후보의 측근 실세들이 한꺼번에 정계 은퇴를 선언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하지만 모두 현실화되지 못했다. 이 후보를 둘러싼 중진 의원들이 일제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초대 총리를 노린 분도 있었고, 초대 법무부 장관을 희망한 분도 있었다. 감투를 벗어내야 하니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희생과 감동을 만들지 못한 창 대세론은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오랫동안 대세론에 안주해 왔던 박근혜 진영에선 ‘안철수 바람’ 이후 갖가지 대책을 모색하고 있다. 돌아선 민심을 되돌리겠다며 출범한 박근혜 비대위가 찾은 해답은 대대적인 인적 쇄신이다. 쇄신안 중엔 ‘5%P 룰’ 구상도 있었다. 당 지지도보다 의원 지지율이 5%포인트 이상 낮은 지역구는 교체한다는 것이다. 그대로 적용하면 영남권 현역 교체율이 90%, 수도권은 70%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사실상 거의 다 쫓겨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2000년 총선 때 당시 이회창 총재가 내놨던 개혁안과 비슷한 레퍼토리란 느낌을 준다. 가장 궁금한 점은 과연 박근혜 위원장이 자신의 측근들을 읍참마속(泣斬馬謖)하는 심정으로 잘라 낼 수 있느냐는 거다. 물론 친박 인사들은 스스로 계파 해체를 선언했다. 비대위에도 참여하지 않고 있다.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는 다짐도 했다. 과거엔 “박근혜를 돕고 싶어도 친박의 칸막이가 너무 높다”는 말까지 나왔지만 요즘은 친박 스스로 최대한 고개를 낮추고 있다.

하지만 몸조심은 거기까지일 게다. 막상 인적 쇄신의 칼날이 자신을 향해 날아온다면 친박 의원들이 순순히 수용하길 기대하긴 어렵다. 아마도 “당을 망가뜨린 건 친이명박계인데 왜 우리가 희생양이 돼야 하느냐”고 반발할 것이다. 10년 전에도 그랬다. ‘대쪽’이란 별명이 있던 이회창 총재도 결국 측근들의 반발을 넘어서지 못했다. 반면 김대중 캠프에선 동교동계란 측근들이 대선 직전 “우리는 모두 DJ가 대통령이 되도 공직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중에 다 지켜지진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신선한 충격을 줬던 게 사실이다.

개혁은 한나라당에 시급하다. 개혁의 핵심은 인적 쇄신이지만 그게 가장 어렵다. 만일 하겠다면 모든 걸 걸고 측근들의 반발부터 쳐내야 한다. 지키지도 못할 장담만 해서 기대감만 높여 놓으면 나중엔 다 부담으로 돌아올 뿐이다. 박 위원장은 창(昌)의 실패에서 배울 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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