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에게 말 못하는 것도 제겐 쉽게 털어놔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경기도 부천정보산업고 또래 해결사 학생들이 5일 하트를 그리고 있다. 왼쪽부터 표세연(18)·성노아(17)·김혜영(18)·호종문(18)·최유리(17)·송민호(17)군. [변선구 기자]

지난해 말 경기도 부천정보산업고 1학년 교실. 두 여학생 사이에 거친 욕설과 고성이 오갔다.

 “남자친구 없다고 무시하는 거니?”(A양)

 “남친이 선물을 사줬다고 자랑한 게 뭐가 잘못인데.”(B양)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곁에서 이 장면을 보던 정현진(16)양이 나섰다. “얘들아, 친구니까 오해 풀고 예전처럼 친하게 지내자.”

 정양은 반의 ‘또래 해결사’다. 친구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거나 따돌림이 발생했을 때 양쪽의 의견을 들어주고 화해를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지난해 이 학교는 정양처럼 친구관계가 원만하거나 상담에 관심이 많은 1, 2학년 학생 28명을 선발했다. 학생들은 학교폭력 대처방법과 대화법 등을 배운 뒤 2학기부터 활동에 들어갔다. 한 학기 동안 학생 간 폭력이나 다툼 등 10건을 해결했다.

 2학년 표세연(18)군은 “친구들이 부모나 교사에게 하지 못하는 얘기도 우리에겐 쉽게 털어놓는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았다. 표군은 지난 2학기 같은 반 여학생들 사이의 따돌림 문제를 해결했다. 5명의 여학생이 여름방학 때 놀러갈 장소를 의논하다 싸움이 났다. 여행 계획은 취소됐다. 4명의 여학생은 방학이 끝난 뒤에도 다른 의견을 낸 한 명을 한 달 넘게 따돌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표군은 중재를 자청했다. 표군은 가해 학생들이 피해 학생이 느낄 수치심을 생각해보도록 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어려움도 있다. 1학년 성노아(17)군은 “싸움을 말리러 나섰다가 ‘네가 뭔데’라며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다툼을 해결하면 보람이 크다”고 말했다.

 이 학교 이은숙(40) 상담교사는 “학교폭력은 작은 다툼 등 사소한 이유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며 “또래 해결사들의 활동은 병이 생기기 전에 미리 대처하는 예방주사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부천정보산업고를 포함해 10개교에서 또래 해결사 제도를 시범실시한 경기도교육청은 올해 20개 학교로 확대할 방침이다.

이한길 기자

◆또래 조정(Peer Mediation)

왕따·싸움·괴롭힘 등 학생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또래가 당사자들을 만나 대화로 풀도록 돕는 프로그램. 1983년 미국 뉴욕의 브라이언트 고교에서 처음 도입했다. 100여 명의 또래와 일반인이 상담자·중재자 교육을 받은 뒤 학생들의 다툼에 개입했다. 그 결과 폭력과 관련된 정학이 연간 63건에서 도입 첫해 34건, 다음 해 18건으로 줄었다. 미국의 학교 1만여 곳에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며 한국 등 다른 나라로 확산되고 있다.

부천정보고 ‘또래 해결사’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