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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보릿고개 넘어라 … 숨죽인 ‘워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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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서울 삼성동 전력거래소 내 중앙전력관제센터 대형 스크린에 전국의 전력수요 및 공급 현황이 실시간으로 표시되고 있다. [김성룡 기자]

2일 오전 서울 삼성동 전력거래소의 팀장 이상 간부들은 시무식 직후 동작동 국립 현충원을 찾았다. “이순신 장군처럼 사즉필생(死卽必生)의 각오로 전력 수급을 관리하자”는 남호기 이사장의 당부 직후였다. 언뜻 생경해 보이는 장면이었지만 이들의 표정은 비장했다. 전력 당국은 이달 중순을 겨울 전력난의 최대 고비로 보고 있다.

 전력거래소는 일찌감치 전시체제로 들어선 상태다. 최전방은 24시간 전국의 전력 수급을 관리하고 비상대응을 하는 심장부 ‘중앙전력관제센터’다. 이곳의 대형 전광판 옆에는 ‘365-1=0’이란 구호가 붙어 있다.

관제센터 관계자는 “1년 365일 중 하루만 문제가 생겨도 모든 노력이 헛수고라는 뜻”이라면서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말자는 의미에서 정전사태 이후 붙여 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회의실에는 ‘워룸(War Room·위기대책 상황실)’이란 팻말이 붙었다.

매일 오전 7시40분이면 진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전력거래소 이사장을 포함한 간부들과 실무팀이 그날그날의 상황을 보고받고 대책을 세운다.

 유례없는 전력난을 맞아 백전노장들도 귀환했다. 30년 이상 경력을 가진 베테랑 계통 운영자 8명이 지난달 새롭게 투입돼 실무진을 돕고 있다. 계통운영처장을 지내고 4년 전 정년 퇴임했던 김경식(62)전문위원도 그중 한 사람이다. 김 위원은 “운영 설비들이 개선되면서 우리가 일할 때에 비해 각종 사고와 고장은 줄었다”면서 “하지만 그러다 보니 갑작스러운 사고에 대응할 수 있는 경험이 부족한 측면이 있어 이를 보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기상청 출신 날씨 전문가도 두 명을 채용했다.

 전기는 편리한 에너지다. 하지만 관리하는 입장에선 여간 까다롭지 않은 에너지기도 하다. 수요와 공급 어느 한쪽으로 힘이 기울어도 시스템 전체가 무너지는 위기가 올 수 있다. 지난해 9월 15일 예비전력이 동나면서 블랙아웃(대규모 정전) 직전까지 간 것이 그 예다.

석유나 가스처럼 비축할 수도 없다. 생산 즉시 쓰지 않으면 바로 사라져 버려 무작정 많이 생산하는 건 큰 낭비다. 전력거래소 관계자는 “우리 업무는 마치 줄다리기에서 승부가 나지 않도록 팽팽하게 유지하는 일과 같다”고 말했다. 수급뿐 아니라 전국에 촘촘하게 깔린 송전망도 감시해야 한다. 주요 송전선 하나가 망가지면 인근 다른 선로로 부하가 과도하게 걸리면서 연쇄적으로 붕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수급 상황은 예상보다는 순탄하다. 올겨울 들어 최고 수요는 27일 오전 10시에 기록한 7255만㎾. 당시 공급능력은 7970만㎾로 전력예비율은 9%대였다. 겨울 대부분 기간 예비전력이 400만㎾를 밑돌 것이란 정부의 예측보다는 훨씬 여유롭다. 하지만 이는 지난달부터 시작된 강력한 전력 사용 규제 덕이다.

지난달 5일부터 정부는 오전 10시~낮 12시, 오후 5~7시 피크시간대 전국 4만9000개 빌딩의 난방 온도를 제한하고 대기업들에 전년 대비 10% 절전을 의무화했다. 이를 통해 150만~200만㎾의 전력 수요를 줄였다는 게 전력 당국의 추산이다.

급전운영팀 정래혁 차장은 “본격적인 절전 규제가 시작된 지난달 15일 이후 전력 피크 시간이 예전보다 한 시간씩 당겨진 게 그 증거”라고 말했다. 결국 이런 규제가 없었다면 전력수요는 이미 지난해 1월 17일 기록했던 종전 피크치(7313만㎾)를 훌쩍 넘었으리란 추산이다.

 ‘1월 전력 보릿고개’의 정점은 둘째, 셋째 주가 될 전망이다. 과거 겨울 피크의 대부분도 이 기간에 발생했다. 최대 복병은 역시 날씨다. 겨울철 기온이 섭씨 1도 떨어질 때마다 전력수요는 60만㎾가량 늘어난다. 그런 면에서 지난겨울 실종됐던 ‘삼한사온(三寒四溫)’ 현상이 최근 재개되고 있는 건 희소식이다. 절대 온도도 중요하지만 추위의 지속 기간이 길어질수록 난방수요도 급증하기 때문이다.

 전력거래소가 꼽는 또 다른 복병은 예년보다 빠른 설 명절이다. 수요 예측은 기본적으로 전년 같은 기간, 그리고 직전 주의 추세 등 과거 데이터를 참고해 작성된다. 긴 휴일 등 변수가 끼어들 경우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생길 가능성도 그만큼 커진다. 9·15 정전사태 역시 추석 명절 직후 발생했다. 정래혁 차장은 “명절 쉬었던 공장들이 일시에 돌아가기 시작하고 거기에 기온까지 크게 떨어질 경우 예상치 못하게 전력 수요가 급증할 수 있다”며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 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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