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무버’로 변신하라 … 삼성사장단 예술·인문학 열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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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삼성그룹의 수요사장단협의회에서 지난해 가장 빈번히 다룬 강연 주제는 인문·예술이었다. 이제껏 세상에 나온 적 없는 제품을 창안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근원적 욕구에 대한 탐구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삼성전자 최지성 부회장(사진 오른쪽)이 독일 고위관료들에게 갤럭시 노트를 소개하는 모습. [중앙포토]

“조선왕조가 그토록 장수했던 비결이 뭡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세 가지를 꼽습니다. ‘자주·민본·실용’이라는 가치를 내세운 점, 인재를 폭넓게 쓴 점, 그리고 후대가 참고할 수 있도록 역사를 철저히 기록한 점입니다.”

 어느 대학의 사학(史學)과 강의실에서 오간 문답이 아니다. 지난해 6월 8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열린 수요사장단협의회 모습이다. 매주 수요일 오전 8시 삼성그룹 내 계열사 사장 40여 명이 모이는 사장단협의회에선 사내외 인사의 강연과 내부 토론이 한 시간 남짓 이뤄진다. 이날 강연에 나선 이는 건국대 사학과 신병주 교수였다. 이날뿐이 아니었다. 2011년 한 해 동안 사장단협의회 강연자로 나선 이들의 38.3%가 인문·사회 분야 전문가였다. 경영·경제 분야 전문가와 맞먹는 비중이다. 예술·스포츠 분야까지 합치면 절반 가까이 된다. 2011년 삼성그룹 사장들은 인문학과 예술을 탐독했던 셈이다.

 수요사장단협의회는 ‘대한민국 경제 풍향계’로 불린다. 매주 환경·국제정치부터 경영전략까지 다양한 주제의 강연이 열리는데 이를 보면 삼성의 전략과 재계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그런 자리에 인문·예술 분야 전문가들이 두 번에 한 번꼴로 초청된 까닭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삼성의 전략이 바뀐 것”이라고 분석했다. 과거에는 글로벌 일류 기업의 기술력·품질력을 쫓아가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을 썼다면 이젠 시장을 선도하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 전략을 쓴다는 것이다. 김희천 고려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퍼스트 무버는 지금까지 나온 적 없는 새로운 제품으로 시장의 틀을 바꿔야 한다. 소비자는 원했지만 아직 나오지 않은 제품을 만들려면 인간의 근원적 욕구를 탐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술과 경영 같은 비즈니스 영역과 인문·예술의 결합은 일류기업의 공통된 화두”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기술이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도 한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기술로 차별화하기 힘들어지면서 브랜드 이미지나 디자인 같은 감성적 요소가 부각됐고, 이에 따라 기업이 감성의 영역을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박상용 연세대 경영대학원장은 “정보기술(IT) 혁명이 이 같은 결합을 더욱 가속화시켰다”고 봤다. 과거엔 만나거나 연결될 수 없던 영역의 사람들이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접하게 되면서 이종 간 결합이 사회적 트렌드가 됐다는 말이다. 박 교수는 “스티브 잡스형 인재가 각광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사회적 변화 때문”이라고 말했다. 공병호경영연구소 공병호 소장은 “삼성이 창조를 고민하는 세계 일류기업이 됐다는 뜻”이라며 “창조는 새로운 것을 접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건희 회장은 지난해 신년사에서 ‘창조경영’이란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강연 주제로 가장 많이 등장한 키워드는 ‘리더십’이었다. ‘지휘자의 열정과 리더십’(KBS교향악단 함신익 지휘자), ‘스포츠 명가에서 배우는 철(鐵)의 리더십’(경희대 체육학과 김도균 교수) 등 인문·예술 분야 강연도 리더십에 관한 주제가 많았다. 1위·일류도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였다.

 젊은 세대와의 소통을 고민한 흔적도 보였다. 김난도 교수는 “소비자·유권자로서의 젊은 세대에 대한 내용으로 강연을 꾸몄다. 사내 젊은 직원이 많을 뿐만 아니라 IT가 발전하면서 시장에서 젊은이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이 직면한 문제의 답을 찾고자 마련된 강연 역시 눈에 띄었다. 지난해 초 소니를 비롯한 일본 기업들이 삼성전자와의 제휴를 꺼리는 등 견제가 심해지면서 이건희 회장이 일본 출장길에 나섰을 무렵엔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 교수를 초청해 ‘일본에서 보는 삼성’이란 주제로 강연을 들었다.

정선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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