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얼굴] 그라운드의 신사, 보비 찰튼(Bobby Charlton)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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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축구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페어플레이 정신이다. 지난 7월 막을 내린 유로2000에서도 선수들은 페어플레이 정신을 상징하는 깃발을 앞세우고 상대팀 유니폼을 입은 어린이의 손을 잡고 경기장에 입장했다. 동시에 FIFA는 갈수록 규정을 강화시켜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FIFA를 비롯해 각 국의 축구협회가 규정을 강화해도 선수들의 거친 행동과 반칙을 계속되고 있다. 오히려 심판의 시선이 가린 지역에서 교묘한 반칙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때문에 현역 선수 중 국내외를 막론하고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경고나 퇴장 한번 안 당해본 사람은 찾기 힘들다.

그런데 18년 동안의 선수 생활동안 단 한번도 경고나 퇴장을 당해본 일이 없는 선수가 있다. 바로 1966년 월드컵에서 조국 잉글랜드에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을 안긴 보비 찰튼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잉글랜드가 낳은 최고의 축구 영웅으로 지금도 국민들로부터 ‘미스터 잉글랜드’라는 호칭과 함께 영국 축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보비 찰튼은 1937년 10월 11일 영국 북동부의 작은 탄광촌인 애싱턴(Ashington)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보비 찰튼이 처음 축구를 접하게 된 것은 집안의 영향이 컸다. 찰튼의 외할아버지와 4명의 외삼촌은 유명한 프로축구 선수였다. 그 중 한명은 프리미어 리그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맹활약한 재키 밀번이었다.

집안의 내력때문인지 보비 찰튼의 어머니는 아들이 일반적인 교육을 받으며 인형처럼 커가는 것을 거부했다. 또한 탄광촌에서 어린 소년들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놀이는 축구뿐이었고 형제의 기량은 또래 어린이들에 비해 월등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찰튼에게 프로리그는 동경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후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감독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매트 버스비(Matt Busby)가 단지 탄광촌에 축구 잘하는 소년으로 묻힐뻔한 보비 찰튼을 발굴했다.

당시 매트 버스비는 이른바 “Busby Babes”라 불리는 젊은 유망주들은 전국에서 발굴했다. 그런 그에게 보비 찰튼의 재능은 다른 아이들보다 특별하게 보였다. 결국 보비 찰튼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본격적인 축구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버스비로부터 기본 교육과 훈련을 받은 찰튼은 1955년 꿈에 그리던 프리미어 리그에 첫 발을 디뎠다. 당시 맨체스터는 지금처럼 최강자는 아니었다. 1910-11시즌 리그 우승, 1909년 FA컵 우승 이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맨체스터는 버스비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개혁을 시작했다.

1945년 감독으로 취임한 버스비는 끊임없는 팀 개혁을 통해 1951-52 시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옛 명성을 회복했다. 찰튼이 맨체스터의 입단한 시기는 팀이 리그 정상권의 위치를 굳혀가던 중이었다.

보비 찰튼은 프리미어 리그 첫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면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그리고 버스비 감독의 신뢰 속에 주전 자리를 굳혔다. 보비 찰튼이 프리미어 리그에 데뷔한 1955년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50년대 들어 프리미어 리그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한 시즌을 거치는 동안 찰튼은 팀의 주 득점원으로 자리를 굳혔고 발군의 실력을 선보이며 찰튼의 시대를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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