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군사 쓸어버릴 듯한 붓의 힘, 명필 김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김생의 ‘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 ‘감호의 흐르는 물은 봄 되자 출렁이고, 미친 나그네가 배를 저으니 고상한 흥취도 많다’라고 시작되는 이백의 시를 흐르는 듯한 행서·초서로 썼다. 16세기 탁본첩 『해동명적(海東名跡)』의 첫 장에 실린 작품이다.

고려의 명문장가 이규보는 저서 『동국이상국집』에서 그를 중국의 왕희지(王羲之·307∼365)와 함께 ‘신품제일(神品第一)’로 극찬했다.

 조선의 문신 성대중은 대표작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 글씨를 두고 “그 획이 마치 삼만 근의 활을 당겨 한발에 가히 수많은 군사를 쓰러뜨릴 것 같다”고 평했다.

 이러한 극찬의 주인공은 ‘해동서성(海東書聖)’이라 불리며 한국 서예의 전형을 완성한 신라 명필 김생(金生·711∼791 이후)이다.

 중국에 왕희지가 있다면 한국엔 김생이 있다는 말이 있다. 왕희지가 이전 시대의 전서(篆書)·예서(隸書)를 토대로 위(魏)·진(晉) 시대 이래 서법(書法)을 세웠다면, 김생은 통일신라 이전의 삼국 글씨를 토대로 왕희지의 서법과 당나라 서법까지 하나로 녹여 우리나라 글씨의 법(法)을 일으켰다. 그 이후 고려의 탄연, 조선의 안평대군·한석봉·김정희 같은 명필이 등장, 한국 서예는 중국 서예와 같고도 다른 궤적을 걸어왔다.

 서울 예술의전당이 경상북도와 함께 김생 탄생 1300주년 기념 ‘필신(筆神), 김생에서 추사까지’전을 연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다. 김생이 남긴 ‘낭공대사비’‘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 등 탁본을 시작으로 탄연·안평대군·한석봉·김정희까지 큰 줄기를 세웠다.

 이외에 선조·영조·정조 등 왕의 글씨, 이황·허목·송시열 등 도학자(道學者), 서산대사 같은 선승(禪僧) 등 우리의 역대 필신(筆神)들이 남긴 글 30선을 모았다. 전시를 기획한 서예박물관 이동국 큐레이터는 “20년 넘게 서예 전시를 기획하면서 ‘한국 서예는 중국의 아류 아니냐’라며 가볍게 보는 데 대한 피해의식이 있었다. 이를 극복하게 한 우리 서예의 발원지가 바로 김생”이라고 말했다.

 한국 서예의 기나긴 맥을 훑는 전시는 2부로 구성됐다. 1부 ‘필신’전은 내년 2월 12일까지이며, 뒤이어 2부 ‘문도(聞道, 도를 듣다)- 김생과 권창륜·박대성 1300년의 대화’가 3월 4일까지 이어진다. 성인·대학생 7000원. 02-580-1660.

권근영 기자

◆김생(金生)=통일 신라의 명필이다. 『삼국사기』엔 그에 대해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80이 넘었는데도 글씨쓰기를 쉬지 않아 각체가 모두 신묘한 경지에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글씨는 모두 비문과 그 탁본이다. 대표작으로 통일신라 고승 낭공대사의 행적을 기리는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있다. 동양의 각종 서체를 통합해 소위 ‘추사체’를 완성한 추사(秋史) 김정희는 이 비석을 몸소 탁본으로 뜨며 서체를 연구 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