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게릭병 박승일, 꿈만 같은 성탄 콘서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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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에 앉은 박승일씨가 가수 소향의 성탄 콘서트 공연장 맨 앞줄에서 관람하고 있다.

23일 오후 8시 서울 군자동 세종대 대양홀.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기독교 음악) 가수 소향(33·사진)의 크리스마스 콘서트가 열렸다. CCM그룹 ‘포스’의 메인 보컬인 소향은 4옥타브 넘는 음역을 소화하는 기독교 음악계의 스타다.

 객석 가장 앞줄엔 특별한 손님 한 명이 와 있었다. 인공호흡기가 연결된 휠체어에 거의 눕듯이 앉혀진 그는 10년째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전 프로농구 선수이자 코치 박승일(40)씨였다. 그는 온몸 근육이 점차 마비돼 지금은 눈동자 외에 움직일 수 있는 게 없다.

 소향은 이번 무대를 준비하면서 루게릭병과 박씨를 알게 됐고, 환우와 가족들을 공연에 초대했다. 공연 수익금의 일부는 박씨와 가수 션이 공동대표로 있는 ‘승일희망재단’에 기부키로 했다. 소향 자신 역시 자궁암 진단을 받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은 아픔이 있다.

 하지만 공연 당일 몰아친 한파로 다른 환우들은 공연장에 올 수 없었다. 박씨 가족만이 오후 5시 경기도 용인 수지의 집을 출발, 세 시간 만에 공연장에 도착했다. 공연장 입구 계단 앞에서 이들에게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건물이 오래돼 휠체어를 들어 올리는 시설이 없었던 것. 그때 관객 7~8명이 박씨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힘을 합쳐 휠체어를 탄 박씨의 몸을 계단 위로 들어 올렸다.

 공연이 시작되자 소향은 ‘기쁘다 구주 오셨네’ ‘주 없이 살 수 없네’ 등 찬송가와 ‘White Christmas’ 같은 캐럴을 열창했다. 공연 중반, 소향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써왔다”며 박씨 앞에 섰다.

 “형제의 싸움은 형제의 싸움만이 아닙니다. 희망을 필요로 하는, 꿈이라는 것이 너무나 절실한 영혼들을 위해 형제가 쟁취한 매일매일의 승리는 그들에게 진정한 꿈이 무엇인지 희망이 무엇인지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더 많은 꿈을 꿔 주시길, 희망을 보여주시길, 더 멋진 것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관객의 박수 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소향은 이어 박씨가 미리 신청했던 ‘실로암’을 부르기 시작했다.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을/ 나에게 영원한 기쁨 속에서 깨이지 않게 하소서.”

 박씨의 눈에서, 그리고 아버지 박진권(73)씨와 어머니 손복순(70)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튿날 오전, 박씨는 소향에게 문자를 보냈다. 간병인이 글자판의 자음과 모음을 차례차례 짚으면 눈꺼풀을 떨어 원하는 글자를 선택하는 방식이었다. ‘어제 대박이었어. 너무 감동받았어. 메리 크리스마스’.

송지혜 기자

◆루게릭병=몸에서 운동신경세포만 점차 소실돼 근력 약화와 근위축을 초래, 사지위약과 언어장애 등 증세를 보이다 결국엔 호흡장애 등으로 사망에 이르는 병이다. 국내에 5000여 명이 투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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