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3) – 첫 대회 첫 기록과 화제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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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월드컵은 대회 자체가 세계 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기념비적인 일이다. 1회 대회의 성공으로 월드컵은 70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 최고의 축구 대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

때문에 월드컵에 있어서 1회 대회는 그 자체가 하나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동시에 1회 대회인 만큼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는 기록들이 있다.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같은 기록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월드컵 첫 골 : 프랑스 – 멕시코 개막전. 전반 19분 프랑스의 로랑
⊙ 월드컵 첫 해트트릭 : 아르헨티나 – 멕시코 전. 아르헨티나의 스타빌레(전반 8분, 17분. 후반 35분)
⊙ 월드컵 첫 자살골 : 파라과이 – 미국 전. 파라과이의 곤잘레스(전반 15분)
⊙ 월드컵 첫 퇴장 : 루마니아 – 페루 전. 페루의 드 라스 카스
⊙ 월드컵 사상 첫 부상자 : 프랑스 – 멕시코 전. 프랑스의 골기퍼 데포

하지만 우루과이 월드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반드시 이러한 기록때문은 아니다. 축구를 사랑하는 열정이 없었다면 첫 월드컵은 열리기 힘들었다. 월드컵을 개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FIFA 집행위원회와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도 첫 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경기장을 신축한 우루과이 정부의 추진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월드컵은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루과이 월드컵은 기록 이외에 지금까지 입에 오르내리는 화제거리도 많았다.

월드컵이 시작한 후 가장 먼저 생긴 에피소드는 프랑스 – 멕시코 전에서 발생했다. 프랑스와 멕시코의 월드컵 첫 경기 전반 10분 경. 프랑스 수비진을 뚫고 돌진하던 멕시코의 메히야가 공 대신 프랑스의 골기퍼 데포의 턱을 걷어찼다. 큰 충격을 받은 데포는 당연히 더 이상 경기를 진행 할 수 없었다.

문제는 이때부터 발생했다. 당시는 경기가 시작되면 더 이상 선수를 교체 할 수 없었다. 일반 필드 플레이어도 아닌 골기퍼가 부상을 당한 프랑스는 난감했다. 결국 수비수인 샹트렐이 데포 대신 골기퍼를 맡고 경기를 진행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

첫 월드컵의 마지막 경기인 결승전에서는 선수들과 함께 양국 관중들도 맞붙었다. 오늘날의 관중 소동과 같은 것이 이미 1930년에도 존재했던 것이다. 월드컵 이전부터 라이벌 관계에 있던 양국의 충돌을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다. 때문에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의 10만장에 가까운 입장권 중 만 장만을 할애했고 철저한 검문검색으로 많은 총기를 압수했다.

그러나, 경기종료 후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은 아르헨티나 관중들은 난동을 일으켰다. 동시에 아르헨티나 현지에서는 국민들이 우루과이 영사관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양국은 한동안 국교를 단절하기에 이르렀다.

우루과이 대회에서 새롭게 떠오른 스타들도 있다. 우승팀 우루과이에서는 외팔이 선수 카스트로가 단연 화제의 인물이었다. 어릴 때 사고로 한 팔을 잃은 카스트로는 귀신 같은 발재간을 선보이며 두 골을 뽑아내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8골을 몰아넣으며 대회 득점왕에 오른 아르헨티나의 스타빌레도 관심을 모았다. 스타빌레는 원래 후보 선수였다. 그러나 주전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던 페레이라가 첫 경기인 프랑스전을 마치고 학기말 시험을 위해 귀국해 버렸다. 이 때 대타로 투입된 선수가 바로 스타빌레. 스타빌레는 멕시코전에서 월드컵 첫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맹활약, 팀을 결승전까지 이끌었다.

많은 기록과 화제를 남긴 우루과이 대회는 18일 동안 총 18경기를 치르면서 55만 명이 넘는 관중을 모았고 25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남긴 성공적인 대회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세계는 다음 월드컵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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