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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사법’ 흔드는 자,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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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권석천
사회부문 차장

“법원은 사회를 지키는 댐”이란 말이 있다. 댐 안의 수량이 적을 땐 찰 때까지 기다린다. 위험수위에 다다르면 수문을 연다. 법원이 너무 앞서나가서도 안 되지만 사회 변화에 뒤처져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지난 9월 막을 내린 이용훈 대법원장 시대엔 ‘독수리 5형제’가 주목을 받았다. 진보·중도 성향의 대법관 5명은 논쟁이 없던 대법원에 새 바람을 몰고 왔다. 중요 이슈를 놓고 보수 성향의 대법관들과 논리 대결을 펼쳤다. 여러 갈래의 시각이 ‘다수의견’ ‘소수의견’으로 정리되면서 사회 갈등에 마침표를 찍었다.

 판사들의 성향이 보수나 진보, 그리고 중도로 나뉘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념 갈등이 심했던 한국 사회에서 판사들만 동떨어져 있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대법관이나 판사들을 보수 인사로만 채워야 한다는 발상은 위험하다. 재판에서 한쪽 목소리가 배제된다면 법의 테두리 밖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커지게 된다. 다양한 의견이 경쟁해야 법리도 발전할 수 있다. 물론 판사 자신의 성향을 최대한 객관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법적인 판단은 감정이나 정서가 아닌 엄정한 논리로 제시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1심, 2심, 3심의 여과장치를 통과해 사회를 규율할 힘을 얻게 된다.

 김하늘 판사 등 판사 166명이 법원 내부통신망에서 ‘한·미 FTA 연구를 위한 태스크포스 팀 구성’을 건의한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봐야 한다. 당초 김 판사가 ‘FTA 재협상’을 들고 나왔지만 동료 판사들과의 논의를 거쳐 ‘연구’로 바뀌었다. “국내 법률과 동등한 효력을 갖는 조약에 대해 그 내용을 연구하고 법률적 문제점을 검토해 보자”는 취지를 배척할 이유는 없다. 토론 과정에서 보완대책이 나올 수도 있다.

 A4 10장 분량의 이 건의와 요즘 온라인을 휘젓고 있는 몇몇 판사의 단편적 발언은 구분돼야 한다. 이들은 “판사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표현이 꼭 대통령에 대한 조롱이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가카(각하)의 빅엿” “가카새끼 짬뽕” 같은 자극적 문구가 우리 사회의 진보에 무슨 도움이 된다는 것인가. 판사 신분을 밝히며 현안마다 코멘트하는 모습을 보면 판사직을 확성기로 활용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번잡한 말들이 오가는 사이 판사 166명의 건의문은 그 빛이 바래고 있다. 법원 내 진보의 입지도 좁아지고 있다. 진보를 외치는 이들이 오히려 ‘진보 사법’의 토대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한 진보 성향의 판사는 “보수편향적인 판사들도 모두 사퇴하라. 나도 깨끗하게 물러나 주겠다”고 했다. 성향을 이유로 법복을 벗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대신 시대와 사회를 향한, 진지한 고민이 담긴 판결을 해주길 기대한다. 소설 제목을 빌려 한 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다. “제발 조용히 좀 해요.(Will you please be quiet, please?)”

권석천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