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미인' 에로를 가장한 멜로드라마

중앙일보

입력

여균동 감독은 국내 영화감독으로선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 영화배우로 스크린에 얼굴을 비춘 바 있고, 한 공중파 영화 프로그램에서 진행자를 맡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미인〉의 원작이라 할 수 있는〈몸〉이라는 책을 직접 쓴 바 있다.

신인배우들과 함께, 다소 '도발성'으로 포장한 듯한〈미인〉이라는 영화를 제작한다고 했을 때, 당연하게도 관심이 쏠렸다. 아마도 한국영화에 대한 기대치가 한껏 높아진 최근 상황에서 지극히 일상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소유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고 온몸으로 감흥을 느끼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미인〉에 관한 감독의 연출의도다. 과연 어떤 영화가 탄생했을까?

영화 줄거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이름도 없는 남녀가 만나고, 죽음으로 향하는 길목에 선다.〈미인〉에서 인터뷰를 위해 기다리던 '남자'는 '여자'를 만난다. 남자는 우연히 재회한 여자를 집으로 데려와 따뜻하게 감싸준다. 여자는 남자의 일상 속으로 깊숙하게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여자는 핸드폰으로 연락이 오면 어김없이 밖으로 외출을 한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옛 남자를 만나고 돌아온 여자는 강박적으로 남자의 몸에 매달리고 둘은 서로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서 섹스에 몰입한다. 그러던 어느날, 여자는 집 앞에 얼굴이 멍투성이인 채 발견되고 남자는 여자를 위해 칼을 손에 쥔다.

〈미인〉은 겉포장이 화사하다. 화면은 CF처럼 깔끔하고 톤이 안정되어 있으며 배경으로 잔잔한 피아노 음악이 내내 흐른다. 얼핏 보면 잘 만든 유럽영화를 연상케 할 정도로 미장센 등의 면에서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영화는 '방'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남녀가 열심히 몸을 섞는 과정을 치밀하게 담아낸다. 그리고 섹스 도중의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장치도 구비하고 있다. 여러모로 봐서 최소한 범작 수준은 나옴직한 바탕을 깔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아쉽게도〈미인〉은 기대치를 만족시키진 못한다. 여러 면에서 애증관계로 똘똘 뭉쳐져 있어야 할 캐릭터들간 대화는 마치 성관계를 첫경험한 10대들의 정신적 수준을 담아내고 있는 것 같다. 여자가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고 있을 때〈미인〉의 남자는 이런 대사를 읊조리곤 한다. "나는 그 여자가 아프다" 무엇 때문에, 어떤 이유로 그가 괴로워하는지 스크린 밖의 사람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사실 〈미인〉의 패착은 이 영화가 '에로'를 가장한 멜로드라마라는 점에 있다. 무작정 상대에게 끌리고, 자기파멸적 사랑에 집착하는 남녀 이야기지만 영화에서 섹스 장면, 그리고 두 중심인물의 대화 사이엔 화해하기 힘든 간극이 보인다. 때로는 야해야 할 섹스 장면이 다소 따분하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영화의 흐름과 서로 맞물리지 않기 때문이다.

여균동 감독의 전작들인〈맨?〉과〈죽이는 이야기〉에 비춰볼 때,〈미인〉 역시 비슷한 궤도에 있다(감독의 영화들 중에선 블랙 코미디인〈세상 밖으로〉나 단편영화〈외투〉가 가장 평가할만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 '성(性)
'이라는 소재는 묘하게도 폐쇄된 자의식과 개인적 판타지의 수준에서 떠오르지 못하고 얼추 유사한 지점에서 맴돈다.

〈미인〉에서 감독이 대단한 영화광이라는 점은 여실히 증명된다.〈베티 블루〉에서〈누드모델〉, 그리고〈감각의 제국〉같은 영화의 흔적이 발견되곤 하니까. 그만큼 연출자가 다른 감독들 영화를 보면서 고심하고 노력한 흔적일 것이다.

하지만〈미인〉을 보면 왠지 일본영화의 싸구려 장르인 로망 포르노가 그리워진다. 과연 사람의 몸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한낱 '도구'일 뿐일까? 일본 로망 포르노는 최소한 인간의 신체가 현실과 부딪히는 방법일 수 있으며, 세상과의 대화를 가능케 하는 하나의 창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곤 했다.〈미인〉에서 몸이란 그저 탐미의 대상이자 기묘한 허식을 담고 있는 장소일 따름이다. 그 점이 내내 아쉽다.

Joins 엔터테인먼트 섹션 참조 (http:enzone.joins.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