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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질서 재편기, 북 지도자 교체는 한국에 기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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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김영희 대기자

김일성의 손자, 김정일의 아들이라는 절대적 프리미엄을 가진 김정은은 아버지가 누리지 못한 시리(時利)를 타고 북한 제1인자의 자리에 올랐다. 중국이 그에게 아낌없는 지지와 축복을 보내고, 미국이 즉각 그를 북한의 새 지도자로 공식 인정하고, 한국까지 절제된 표현으로나마 북한 국민들이 당한 갑작스러운 국상(國喪)에 위로의 말을 전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이 최고지도자로 취임했을 때는 국제적인 환경과 국내 경제사정이 최악이었다. 불과 3년 전에 소련·동유럽 사회주의체제가 붕괴했다. 중국은 이미 ‘사회주의’라는 수식어를 붙인 시장경제로 진로를 잡았다. 체제경쟁을 하던 한국은 여러 해 전에 민주화를 끝냈다. 김정일은 심각한 체제위기를 맞은 나라를 떠안았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북한에 ‘우호 가격’으로 물건을 팔고 자본과 기술을 제공하던 사회주의 형제국들은 이제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비상수단으로 권력기반을 다지면서 자신의 시대를 열어야 했다.

 김정은 시대 원년의 북한은 경제는 어려워도 국제적인 환경은 더 바랄 수 없을 만큼 좋다. 중국의 ‘책봉’으로 김정일의 후계자로 지명된 그는 중국 지도자들의 ‘베이비’다. 김정일 사망이 발표되자 중국이 바로 김정은을 “영도자”로 호칭하고, 그의 중국 방문을 초청하고, 국가주석 후진타오(胡錦濤)가 북한대사관의 분향소에 가서 조문을 했다. 중국은 앞으로도 김정은 체제 지지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북한의 안정적인 전환을 희망한다는 말로 우호의 메시지를 띄우고 뉴욕에서는 이례적으로 북·미 접촉을 가졌다. 한국의 통일부 장관이 북한 주민들을 위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미망인들의 북한 조문을 허용한 것은 조문파동으로 나라가 시끄럽던 17년 전 김일성 사망 때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일본과 러시아도 그들의 방식으로 조의를 표했다.

 왜들 이러는가. 아시아 시대의 요청이다. 김정일이 제1인자 자리에 오르던 1994년 미국은 소련 없는 세상에서 유일한 수퍼파워의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중국은 경제적으로 부상(浮上)을 시작했을 뿐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소련의 일부만 승계한 러시아는 생존에 급급했다. 한국의 김영삼 정부는 북한의 붕괴가 시간문제라고 믿고 흡수통일의 꿈에 들떠 있었다. 한반도 주변의 모든 나라에 북한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사정이 뒤집어졌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의 아시아 복귀를 선언했다. 군사·외교의 무게중심을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 동아시아로 다시 돌린다는 의미다. 미국이 중동에서 국력을 탕진하는 사이에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수퍼파워 지위에 도전하는 수준까지 몸집을 키웠다. 미사일 기술을 업그레이드하고, 항공모함을 건조해 남태평양에서 미국의 막강한 해군력과 맞서고, 세계 제2위가 된 경제력을 무기로 동아시아 국가들을 포섭하고 있다. 아시아의 세기로 불리는 21세기는 중국이 미국의 패권, 미국 중심의 질서에 도전하는 G2시대가 열린 것이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중국의 독점적인 영향력 행사를 차단해야 한다.

 그러니 미국과 중국은 내 편을 지키고 늘려야 한다. 미국은 안보상으로는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을 축으로 한·미·일 안보협력체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는 한·미 FTA로 한반도에 의미 있는 교두보를 구축했다. 중국은 러시아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북한을 지원해 한·미·일 삼각협력에 맞불을 놓으면서 6자회담 무대에서 한반도 문제에 주도권을 잡았다. 일본의 침몰이 중국의 부상을 도왔다. 이런 미·중 패권 경쟁구도에서 북한은 중요한 연결고리요, 균형추다. 그래서 한국·미국·중국이 김정은 체제의 안착을 바라는 우호의 메시지를 경쟁적으로 보내는 역사적인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동아시아의 질서가 크게 재편되는 이런 그레이트 게임에서 우리가 소외되지 않은 파트너가 되려면 북한을 보는 시야를 적어도 아시아 스케일로 넓혀야 한다. 중국과 FTA를 서둘러 미국과의 안보축과 중국과의 경제축으로 한국의 생존·성장 전략을 짜야 한다. 그것이 효과적인 북한대책이기도 하다. 미국에 대해서든 중국에 대해서든 편향된 관계는 현명한 외교가 아니다.

 김정은의 북한에 대해서는 5·24 대북제재의 조속한 해제를 적극 검토하고, 내년 봄 이전에라도 고위급 당국자회담을 제의해야 한다. 천안함에 대한 사과 문제에서도 유연성을 보일 것을 암시할 필요가 있다. 필요하면 사람도 바꿔야 한다. 김정일 시대의 마지막 4년과 이명박 정부 4년이 겹치는 시기에 남북관계는 최악이었다. 김정일이 사망하고 젊고 서양물 먹은 김정은의 시대가 열린 것은 남북관계를 다시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회복할 최선의 기회다. 그렇게 부(負)로 얼룩진 이명박·김정일 시대 남북관계를 자연스럽게 정리하고 넘어가자. 한국은 멀리 미래를 내다보고, 아시아와 세계를 보는 큰 시야로 이 기회를 활용해야 아시아에서 격돌하는 두 거인국들뿐 아니라 수많은 나라들이 서로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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