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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코 나리타 〈사이퍼〉

중앙일보

입력

20대 이상의 독자라면 어릴 때 간간히 문방구나 팬시 제품에서 회색의 긴 눈을 가진 예리한 생김새의 쌍둥이와 금발 여자아이의 일러스트를 자주 보았을 것이다.

세련되고 깔끔한 이 작품의 일러스트는 자주 볼 수 있었고 해적판도 공공연히 나왔지만 미나코 나리타의 〈사이퍼〉는 오래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정식 라이센스가 나온 것은 90년대 후반이었다.

〈사랑은 약속이야〉 등등의 엉뚱한 제목, 먹지를 대고 배껴 그린 펜선, 앞뒤도 안 맞는 엉터리 번역의 해적판대신 뒤늦게 학산문화사에서 12권 전질이 나왔지만 요즘 독자들의 구미에 맞는 자극적인 신간에 밀려 별다른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리얼리즘 만화의 교두보 격인 이 작품의 가치를 재발견한다면 독자들도 이 이상한 쌍둥이 형제들의 매력에 흠뻑 빠져 들 것이다.

이 작품의 의미는 왕자와 공주류의 허황된 이야기에서 벗어나 지금 우리의 현실을 이야기한다는 데 있다.

그 전의 순정 만화는 전쟁, 신분, 종교, 역사적인 갈등 등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숙명을 주로 배경으로 삼고 다소 거추장스러운 주제에 얽매였던 경향이 있었다.

주인공들은 자신의 의지나 뜻에 따르기보다 개인으로서 거역 할 수 없는 거대한 시류에 휩쓸려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져야만 했다.

여기에 미나코 나리타는 동화에서 벗어나 현대의 대도시로 배경을 바꾸면서 주인공의 성격, 기질, 의식의 흐름을 탐구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품은 본격적인 심리물의 시작이라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사람을 움직이는 건 역시 욕망, 콤플렉스, 그리고 사랑!

여기는 뉴욕.
길에 사람이 쓰러져도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다소 삭막하면서도 활기차고 바쁘게 돌아가는 대도시다운 도시이다.

여주인공 아니스 머피는 혈기왕성하고 무척이나 단순한 성격. 그간 만화에서 온갖 섬세한 감정의 나락을 보여주던 가냘픈 여주인공형이 아니다.

이런 의욕적이고 참견을 잘하는 성격 때문에 그녀는 이상한 일에 얽매이게 된다. 일란성 쌍둥이 형제가 2년씩이나 하루씩 교대로 한 사람으로 생활해 왔다는 황당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힌두교도 할머니의 영향으로 빈디를 붙이고 다니는 '시바'처럼 똑같이 이마에 점이 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친구가 되고 싶어진 아니스는 용기를 내 그에게 접근했다.
시바는 그녀가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의 아이돌적인 존재. 프로배우와 모델로 활동하는 동양인의 피가 섞인 그는 까다로운 성격은 아니지만 왠지 친구든 누구든 좀처럼 곁을 안주는 냉담한 면이 있었다.

둘 다 빅애플이라 불리는 뉴욕의 시민이지만 아니스는 가족이나 친구와 교류가 잦은 소시민적이고 따뜻한 세계에서 둘러싸여 자랐기 때문인지 의심이 없는 성격이다.
그러나 시바는 어딘지 수상쩍인 구석도 많고 비밀도 많다. 어릴 때부터 인기스타였지만 화려함 대신 냉소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 범죄율이 높은 할렘 가에 혼자 사는 것도 수상하고 남을 믿지도 않고 경계하되 남이 눈치 채지 않게 하는 것에도 익숙하다.

"친구란 인간에 대한 최고의 존칭이라고 생각해"

드디어 교제를 시작했지만 단순하고 솔직한 아니스는 그의 '적당한 맞장구'에 곧 불만을 품는다. 그녀가 원한 것은 진짜 친구였지만 시바는 여전히 경계만 할뿐이다.
그러다가 그가 아니, 시바와 그의 쌍둥이 동생 '사이퍼'가 2인 1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아니스는 그들 둘을 비교해 구별해 낼 수 있다면 남들에게 이 사실을 밝혀도 좋다는 조건으로 내기를 시작한다.

일란성 쌍둥이.
실제로 어릴 때는 구분이 안갈만큼 거의 흡사하던 그들도 성장하면서 환경적인 요인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비교하자면 낙천적이고 느긋한 성격일수록 키가 크고 성장이 좋아져 외견상 차이가 생긴다던가 인상이 전혀 달라진다던가 . 처음 태어날 때는 거의 차이가 없던 두 사람이 전혀 다른 타인으로 변화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서로 더 닮아가려고 한다. 아무리 쌍둥이라도 각자의 개성을 주장하며 둘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남들에게 납득시키고 싶어하는데...

비밀은 둘을 완벽하게 구별하게 된 아니스가 스스로 내기를 포기함으로써 다시 슬며시 숨어버렸다. 그녀도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기회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왜?
그들은 왜 자신의 아이덴티티(자기 정체성)를 부정하는 것인가? 사라져 버린 사이퍼의 존재는?

2년간 '시바'의 이름으로 하루씩 교대로 살아왔다는 쌍둥이. 학교는 물론 일(그는 아역배우 출신), 쇼핑, 친구간의 교제까지 둘이서 공유해온 것이다. '시바'역을 맡은 한 사람이 밖으로 나가면 남은 한 사람은 집에 틀어박혀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까지. 그래서인지 이 형제는 정신적으로 지나치게 결합되어 있다.

항상 곁에 있지만 정상적이지도 바람직해 보이지도 않은 어딘지 굴절된 형제애. 아니스는 평화로운 그녀의 삶에 뛰어든 이 기묘한 미스터리에 고민한다. 그리고 과감한 행동력을 보인다. 이 쌍둥이들의 생활 속까지 뛰어들어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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