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적 다가오면 새벽까지 특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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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호 06면

한성주(44)씨가 28년 전 빛바랜 사진을 꺼냈다. 가발 원단이 가득한 작업실을 배경으로 16세 소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수출 선적 시기가 돌아오면 하루 종일 일한 뒤 저녁 때 야간학교에 갔다 돌아와 다시 새벽 1시까지 특근을 하곤 했죠.”

가발공장 근로자였던 한성주씨

1983년부터 낮에는 서울 가리봉동의 상영무역이라는 가발업체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고교를 다녔다. “저만 해도 좀 나았고, 같이 일하는 언니들 중에는 박봉으로 온 집안 식구를 부양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가발공장은 60~70년대 한국 수출의 전진기지였다. 한씨는 가발공장 근로자 마지막 세대다. 90년대 이후 대부분의 공장이 중국 등 해외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가발을 직접 손으로 만드는 일은 몹시 고됐다. 촘촘한 가발망사 구멍에 일일이 바늘을 넣어 인조 머리카락을 꿰매다 보면 어깨와 목이 굳고 눈은 침침해졌다. 월급이라야 3만~4만원이었다. 일과를 마치면 ‘토끼방’이라는 좁은 기숙사 방으로 돌아갔다. 방 하나를 대여섯 명이 함께 썼다. “하루 종일 일하고 밤에 들어오면 배가 너무 고팠어요. 기숙사 식당에 몰래 들어가 라면 끓여 먹다 혼난 적도 여러 번이었어요.”

한씨는 고교 졸업 후 계속 상영무역에서 일했다. 중국 공장에서 현지인들에게 기술을 지도하다 95년 결혼하면서 그만뒀다. 지금은 서울 시흥동에서 패션 가발매장을 운영한다.

한씨는 가발공장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이달 초 송년회를 했다. “대부분 잘살고 있더라고요. 어려운 시절을 보낸 만큼 생활력이 보통 강한 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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