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혁명 드라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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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부〉는 조선후기 숙종실록에 단 한줄 등장하는 승려. 3백3년전인 숙종 23년 조선왕조를 멸망시키고 정(鄭)씨 왕조를 세우려했던 대역죄인, 이것이 실록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한줄의 기록을 3권의 장편소설로 풀어낸 작가 이덕일(39.사진)씨는 역사학자. 소설이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역사학 연구성과의 대중화' 를 주장해온 저자의 상상력 덕분이다.

이씨는 역사의 흔적을 찾아 오래된 절들을 답사하면서 많은 절들이 숙종 시기에 크게 재창건됐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왜 하필이면 당쟁으로 혼란이 극심했던 숙종 시기에 이런 일이 많았는가" 라는 의문은 왕조실록을 연구하던중 운부에 관한 기록을 보고 번뜩 해답을 얻었다.

운부가 상징하는 그 시대 불교계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가 아니었을까 하는 판단이다.

그러나 이같은 판단은 직관 내지 상상의 영역에 속한다. 이씨가 소설이라는 형식을 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상상력과 재구성의 출발은 실록에 나온 세가지. 인공 운부가 승려라는 사실, 숙종시대에 일어났다는 시점, 그리고 정씨 왕조를 열려고 했다는 명분이다.

줄거리는 이 세가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조선시대의 승려는 천민(賤民)이면서 지식인이다.

사회적으로 온갖 차별을 받으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앞서 간 사람들이기에 시대의 모순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낀다. 운부는 승려중 고승(高僧)으로 등장한다.

당연히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마침 구월산의 산적두목 장길산도 숙종시대에 활약했기에 운보와 함께 모반에 뛰어드는 조역으로 등장한다. 무술에 능한 승려와 도적, 관군이 어울리는 싸움판은 무협지를 연상시킨다.

마침 남인과 서인간의 당파싸움, 요부(妖婦) 장희빈으로 악명 높던 숙종시기라 소재가 한층 다양하다. 구중궁궐과 권신의 사랑방에서 오가는 은밀하고 추악한 양반사회의 이전투구가 모반의 무리와 반대쪽인 상류사회의 얘기로 함께 진행된다. 음모와 배신과 질투로 이어지는 모양이 TV 역사드라마 같다.

'정씨 왕조를 세우려 했다' 는 기록은 곧 정감록이라는 참서(讖書.앞날을 예언한 책)가 모반의 한 동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소설속에서 정감록의 예언과 더불어 미륵불(彌勒佛)신앙이 미래의 이상사회로 제시된다. 조선시대 민초들이 열악한 현실을 살아가면서 꿈꿨던 '신분차별 없이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사는 세상' 이다.

역사학도인 저자는 이같은 역사적 상황을 극적으로 재구성하면서 끊임없이 역사강의를 한다.

운부의 입을 빌려 불교철학을 얘기하는가 하면 당파싸움의 연원이나 사건의 계보를 잔뜩 집어넣어 어떤 부분에서는 역사이야기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전문작가가 아닌 역사학도가 쓴 소설이 지닌 장점이자 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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