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과학 이론가의 삶 가볍게 풀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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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인간의 거리가 얼마인가? 크리스찬이 아닌 독자들에게는 죄송스러운 질문이 되겠지만, 그 심리적 거리가 아니라 실제로 신이 앉아 있는 자리와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자리 사이의 거리에 대해 의문을 가져 본 사람이 있을까?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기도 하고, 금기인 사과나무를 따먹었을 때 야단도 치는 신의 자리는 과연 인간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을 지 그 거리를 측정해보고자 시도해 본 사람이 있겠는가?

있다. 게다가 아주 정확한 답을 계산해 냈다. 답은 '9광년'이다. 빅뱅 이론의 창시자인 조지 가모브가 바로 그 엄청난 계산을 해냈다. 사람들의 기도가 신에게 전달돼 그 기도를 들어준 시간을 거리로 환산해 계산한 것이다.

성당의 미사 예절 시간에 하얀 밀떡과 포도주는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성당에서는 가르친다. 과연 밀떡과 포도주가 사람의 몸과 피와 같은 성분으로 바뀌었는지를 현미경으로 관찰해 본 사람이 있겠는가?

있다. 더구나 비교를 위해 미리 같은 종류의 빵조각을 붉은 포도주에 담가 놓고 두 빵 조각의 조직이 완전히 같았고 손끝에서 날카로운 칼로 베어낸 피부 조각의 조직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그가 바로 한글로 새로 나온 자전적 에세이 〈창세의 비밀을 알아낸 물리학자 조지 가모브〉(사이언스북스 펴냄)의 저자 조지 가모브다.

러시아 출신의 천체 물리학자 조지 가모브(1904-1968)는 빅뱅 이론을 정립해 우주 기원의 비밀을 밝혀냄으로써 학계에 알려진 사람. 이번에 번역된 이 책은 가모브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생각나는 몇 편의 짧은 글들을 모은 자서전 성격의 에세이다. 저자 스스로 머리말에서 이야기하듯 "저녁 식사가 끝난 후 벽난로의 이글거리는 불꽃 앞에서 친한 친구에게 들려 줄 법한 이야기들, 그러니까 이야기하는 사람도 즐겁고 듣는 사람도 즐거운 그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책 14쪽)로 이루어져 있다.

정통 자서전의 형식은 아니지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가모브는 자신의 친가와 외가가 오래 전에 서로 전쟁의 적이었다는 데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과학자의 글치고는 흥미롭다. 빈틈 없이 책장이 늘어서 있는 아버지의 서재 책상 위에서 자신이 태어나던 때의 상황까지 그려낸다. 대중 과학서를 많이 쓴 그는 자신이 "그토록 많은 저서를 집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서재 덕분"이라고 말한다.(이 책 28쪽)

일반 대중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대중 과학서를 많이 쓴 가모브는 과학계에 '기인'으로 알려져 있다. 기인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들은 적지 않은데 이 책 안에서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능청맞게 풀어낸다. 결혼과 러시아에서의 탈출 과정에 얽힌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 이를테면 보드카의 맛을 조사하기 위해 눈금이 달린 실린더를 이용해 순수 알코올과 증류수를 섞어 맛을 보다가 실험실 복도가 흔들리는 경험을 한 이야기들도 재미있게 그려냈다.

자신의 결혼 이유를 '유전학 법칙'이었다고 고백하는 부분에서는 실소를 멈출 수 없다. 평범하지 않은 자신의 손금이 유전되는가를 알아보고 싶었는데, 그 해답을 알아내는 방법은 자신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의 손금을 들여다 보는 일 뿐이었다. 가모브는 그 문제가 곧 자신의 결혼을 성사시켜 준 원인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부인이 아이를 낳았을 때 병원으로 달려간 그는 간호사에게 아기의 손금부터 살펴보았다고 한다.(이 책 177쪽)

그는 상대성 이론의 아인시타인과 현대 양자이론의 하이젠베르크를 부정하는 러시아를 탈출,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이후 빅뱅이론을 창시한 과학자로 남게 된 것이다. 자신의 이론보다는 삶의 갖가지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한 이 책은 러시아 출신의 과학도가 미국의 과학자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의 진솔한 기록이다.

대중과학서를 여러 권 집필한 경험이 있는 그가 몇 장면의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문장은 대단히 능청맞다. "학문 연구 이야기를 너무 길게 늘어놓아서 독자들을 지루하게 만드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스럽다"는 그의 걱정이 있었기 때문인지 문장은 마치 가벼운 에세이를 읽듯이 읽힌다.

그는 "주된 관심은 자연의 문제를 공략하고 해결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를 잘 해내기 위해서 필요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책을 쓴다는 것이다. 그는 대중 과학서를 모두 스무 권이나 펴냈고, 그 중 하나가 이 책이다. 그 책들 덕분에 56년에는 칼링거 상을 받았고, 인도와 일본 등지로 흥미로운 강연 여행을 했다고 회고한다.(이 책 258-260쪽)

자연과 우주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 들어차 있던 가모브. 스스로 전해주는 그 자신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는 동안 독자들은 우주 창세의 비밀을 알아낸 물리학자의 발상의 독특함, 범상치 않은 연구 과정 등에 대해 새롭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당대 최고의 과학자로 일컬어지는 아인시타인과 만나서 직접 생활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등은 읽는 재미를 배가한다.

천체물리학을 포함한 순수과학에 대해 일반인들은 원론적인 이론서를 통해 관심을 가지기 힘들다. 오랜 수련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그들의 이론을 이해하기 힘든 까닭이다. 그러나 다른 대중 과학서를 여러 권 펴낸 바 있는 가모브 스스로가 펼쳐낸 자신의 이야기는 가볍고도 편안하게 보면서 과학의 알맹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동시에 안쪽에 있는 알파 입자는 절반의 에너지밖에 가지고 있지 않지 않다면 어떻게…"(이 책 106쪽)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라든가 한 쪽 안에 '폴리테크닉 연구소'를 '폴리테트닉 연구소'로 한 교정의 실수가 유난히 눈에 크게 들어오는 것은 이 책이 순수과학에 가까이 할 기회가 적은 일반 독자들에게 소중한 책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고규홍 Books 편집장 (gohkh@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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